“이게 어찌 보명궁에 있는가. 이것은 과인이 태자에게 준 물건인데 어떤 연유로 보명궁에 있단 말인가.”

“마마, 사실은···.”

“사실은?”

“이걸 미실 낭주가 풍류주의 부제 설원랑에게 준 것으로 밝혀졌나이다.”

“무어라?”

“그 점을 이상히 생각해 조사해 보니, 태자마마가 전날 미실 낭주에게 준 것을  다시 설화랑에게 준 것으로 밝혀졌나이다.”

“허어, 이런 일이 있나. 허면, 미실은 나와 만나면서도 은밀히 태자와도 교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런 고이얀! 판관은 즉시 보명궁으로 달려가 미실을 남당으로 끌어오라!”

설판관이 명을 받아 보명궁으로 달려갔으나 미실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곳에 있던 시비들은 간밤에 미실이 보명궁을 나갔는데 이후엔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렇다 보니 월성 안팎에 미실을 찾는 수배령을 내렸다.

월성의 소란과는 달리 간밤에 미실은 동문을 빠져나와 세종 전군이 성 안에서 즐겨 탔던 적기마(赤騎馬)를 타고 서악(西岳)을 향해 달렸다. 달빛이 고운 밤이었으나 아녀자 혼자 말을 달리기엔 적절치 않은 데다 처음 가는 방향이었기에 적기마는 달리기 좋은 곳만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말의 이름은 ‘적록(赤轆)’이었다.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전투에 나가 앞장 서 달릴 줄도 몰랐다. 그렇다 보니 이 말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은지를 몰라 그 동안은 마방에 넣어둔 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적록’은 험한 산길을 거침없이 오르내리며 미실을 서악의 한 곳에 내려놓았다. 여름의 풀벌레가 멀지않은 가을날을 요란스럽게 노래하는 들판은 푸른색 융단을 펼쳐놓은 듯 시원한 개방감이 들기에 충분했지만 오랜 시간 말을 달리고 보니 뱃속이 허전한 게 순식간에 느껴졌다.

미실은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 산중의 여러 풀들에 대해 귀따갑도록 들은 바 있어 먹을 수 있는 풀들을 간단히 추려 허기를 달랬으나 그것으로 차오르는 식욕을 달랠 수는 없었다. 산 속의 옹달샘에서 물 한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정신이 아뜩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것밖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지러운 꿈속에서 산짐승에게 쫓겨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니 자신은 짐승가죽으로 보료를 꾸민 산중의 움막에 누워 있었다. 자신이 정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산 속의 짐승에게 물려온 지를 알 수 없었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어딘가?’

아무리 궁리하고 다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데다 장시간의 말달리기로 육신이 피곤해졌는지 어느덧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땐 움막 밖은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은 듯 싶었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구수하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아늑하게 자극했다. 눈을 뜨지 않았어도 멀지않은 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수염은 텁수룩했지만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말했다.

“자네가 잠자리에 깨어난 건 호흡으로 알 수 있네. 그렇듯 누워 있으니 죽은 것 같네만, 죽음은 그리 쉽게 오지 않네. 하긴 자네가 나를 만난 것도 작은 인연은 아닌 것이네만.”

도무지 모를 소리였다. 월성의 사내들은 자신을 보면 수중에 넣지 못해 안달하는 태도를 취한다. 설령 그렇지 못한다 해도 가까이 오고 싶어 안달을 친다. 그런데 이 사내는 다르다. 자신이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잠이 든 것 같은데 그 이후엔 기억이 없었다. 애써 기억을 추슬려도 생각들은 그 전에 끊겨 있었다.

“이곳은 금역(金域)이네. 월성에서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걸 결코 바람직하게 생각지 않네. 그것은 나의 스승이 이곳에서 독물(毒物)을 키웠기 때문이네.”

“···.”

“아직도 일어날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있게. 하긴, 아직도 독이 풀리지 않았을 게야. ···자네가 궁금해 할 것 같아 말해 주겠네. 이 움막은 옥진궁주에게 도움을 줬던 내 스승이 머문 곳이네. 하마도인(蝦蟆道人)이라고 들어봤을 게야. 선가의 여러 비술에 능숙하지만 특히 방중술엔 일가견이 있으셨지. 어떤 여인이라도 스승의 삼일산(三日散)에 중독되면 자신의 생각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스승의 지시만을 따르게 되네.”

  부스럭대며 미실이 일어나는 기척이 있었으나 사내는 아랑곳없이 뒷수쇄를 채워갔다.

“중원엔 그런 술이 있다 들었네. 잠을 든 지 이레 만에 깨어나거나 천날 만에 깨어나는 천일주(千日酒)가 있다 들었네. 그러나 그것은 스승님이 만드시는 삼일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세상의 독(毒)은 자신이나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었지만 스승님께서 만드신 건 죽이는 것보다 조종하기 위해 필요하지. 자네, ‘고(蠱)’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서악(西岳) ; 선도산

▲삼일산(三日散) ; 극독

▲천일주(千日酒) ; 천 일만에 깨어나는 술

▲방울장식 송곳입니다. 민간에서 쓰던 물건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