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자 태후전(太后殿)의 약사가 남당(南堂)을 찾아와 공무가 끝나는 대로 들러달라는 지소태후의 명을 전했다. 변경에서도 특별한 연락이 오지 않고 보니 잡다한 일 몇 가지뿐이어서 진흥왕은 햇살이 선도산(仙桃山)에 걸려 있는데도 찾아들었다.

“내가 주상을 보자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내명부 아이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자하니 주상이 새로이 후궁을 거둬들였다면서요?”

“그러하옵니다, 어마마마. 어떤 연유인지 모르오나 왕후가 옥진궁주의 손녀 미실을 후비(后妃)로 천거하지 뭐겠습니까.”

“그 아이가 세종 전군의 부인이란 사실도 아시고 계십니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명을 내리고 보니 미실이 세종 전군의 부인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오호호호호, 하긴 그리 됐으니 명을 되돌릴 수도 없었겠군요. 군왕의 명은 섣불리 되돌리지 못한다는 게 왕실의 법도지요. 주상, 내가 주상을 뵙자고 한 것은 그런저런 소식을 나중에 알았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어미로서 모처럼 주상의 정령이 떨어졌으니 그것을 빛나게 해야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 나라는 주상의 나랍니다. 무엇을 하건 주상의 행동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일을 진행하는 건 신하들을 격분시켜 일을 그르치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러나 주상이 신국의 발전을 위해 행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아랫사람은 따라야겠지요.”

맞는 말이었으나 그게 진흥왕을 부른 본래의 의도는 아니었다. 신라의 제왕이 후비 한 사람을 택한다 하여 지소태후가 나서서 시비 걸 일이 아니었으나 상대가 진흥왕의 씨 다른 동생 세종 전군이었다. 그렇게 보면 미실을 후비로 얻어 들인 대가를 찾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기에 그 대가를 진흥왕은 슬며시 꺼내들었다.

“그렇잖아도 태후마마를 소자도 찾아뵈올까 했습니다. 전날의 약속도 있는 데다 상황이 묘하게 변해 양해도 구해야 했구요.”

“전날의 약속이라니오?”

“세종 전군을 풍류주에 임명하는 일입니다.”

사다함이 죽은 후 풍류주 자리가 비어있었기에 태후는 몇 차례나 진흥왕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렸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보니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아 전전긍긍 하던 참이었다. 그게 진흥왕에게서 나오자 태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세종 전군이 마음 아파하는 걸 뻔히 알기에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진흥왕이 어려 일찍이 수렴청정해 왔지만 그것은 아드님을 위한 것이지 자신이 치세를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도(權刀)는 손에 쥐기만 하면 상대를 베고 죽이고 싶은 광기가 흐른다. 스스로의 영달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치세에 막힘과 멈칫거림이 없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있었다. 아드님 진흥왕이 서른이 넘은 지금 마음속으로 미워하던 그늘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태후가 살 길이었다.

세종 전군이 풍류주가 되면 막대한 병권(兵權)이 생긴다. 그것은 세종 자신에게도 영예로운 일이지만 지소태후에게도 간접적인 영향력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이제는 미실에 대한 미움을 걷어낼 시기라 생각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결정해야할 상황 같았으나 아주 적당한 시기라 여겼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분야를 잃어야 하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아깝다거나 아쉬워할 이유를 표시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을 알기에 지소태후는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꺾고 있었다.

“주상, 어미는 주상의 성력(性力)이 되살아나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마음속 응어리가 다 녹은 듯합니다.”

“어마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내가 만월성을 남도(南桃)로 꾸밀 때 사람들은 그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혼자된 여인네가 사내를 불러들여 행음(行淫)을 치르는 요사스런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어마마마.”

“주상, 더 들으세요. 어미가 왜 남도를 만들었는지 주상은 모르십니다.”

“···.”

“왕실은 겉으로 보면 남녀가 함께 어울려 평온을 유지한 듯 싶으나 한 걸음 더 내딛어 속내를 살피면 안심할 수가 없는 위험 천만한 곳이지요. 사내들의 힘겨루기가 날뛰다 보니 아녀자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사내들의 넘치는 힘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남돕(南桃)니다. 성곽이 허물어져 폐가처럼 쓸모없는 곳입니다만, 이곳을 개조해 사내들의 힘을 분산시켰다가 치마 속에 모으라고 한 게 밀교의 수법자 연화사(蓮花師)의 진언이었습니다.”

“하오면?”

“주상은 그렇겠지요. 젊은 날 향연을 베푼 장소에 대해 왜 핑계가 많으냐고요.”

“아닙니다, 어마마마.”

“어미가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알지요,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주상, 세상 사람들은 모른 게 있어요. 자신의 생각이 맞다 여기면 모든 의견이 잘못됐다고 우기는 게 세상인심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두세요. 남도는 아녀자가 놀이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제왕의 놀이텁니다. 장차 주상이 사내의 힘을 찾게 되면 중원의 제왕들처럼 이궁(離宮)으로 사용해 놀이를 즐기라는 것이지요. 여기엔 은밀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연화사(蓮花師) ; 만월성이 허물어져 그곳에 궁을 지을 때 참여했던 밀교의 수법자

▲이궁(離宮) ; 별궁과 뜻이 같음

▲작은 의식(儀式)에 사용했던 기구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