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궁의 사도왕후 처소를 찾은 진흥왕은 감개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모든 권한이 지소태후에게 있었으니 이름뿐인 대왕으로서는 자주 왕비 처소를 들락거렸으나 지금은 모든 권한이 왕에게로 이양돼 처리해야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수척해진 낯으로 왕비를 찾은 대왕은 좋은 술과 안주가 차려진 자리에서 오랜만에 왕비의 권주(勸酒)를 흥겹게 받아들였다.

“마마, 공무가 많사옵니까?”

“진(陳)나라를 다녀온 사신의 말에 수문제(隋文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중원을 통일했으니 고구려를 들쑤시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힘이 약한 신라까지 건드릴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이전에 진숙보가 천보노(千步弩)를 청했었는데 과인이 그걸 세 개나 보낸 데 대해 감사의 말도 전해왔습니다.”

대왕은 얘기를 다시 틀었다. 변방에 칩거하는 병력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파발을 보내 좀 더 수나라와 백제의 동향을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권한을 이양 받았으니 한시라도 가만있을 수 없는 게 대왕의 마음이었다. 나라 밖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다소 위험이 닥치더라도 방비를 철저히 한 상태니 큰 걱정은 없었지만 월지궁에 들어서는 순간 왕비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자 왕은 약간 긴장했다.

“과인을 부른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렇습니까?”

“대왕께서 부국안민(富國安民)에 노심초사하는 걸 월성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시세의 흐름을 조급히 생각 마시고 찬찬히 하시라고 청했습니다.”

“오, 그래요?”

“대왕, 궁 안에 한 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왕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일은 태후마마께서 관여돼 있어 말씀드리기가 참으로 난망스럽습니다.”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말씀하세요. 어마마마의 소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래, 세종 전군의 내자와는 화목하게 잘 지냅니까?”

“사실은 그 일 때문에 마마를 청했습니다.”

“아니 왜요?”

사도왕후는 내심 심호흡을 깊이 몰아쉬었다.

“태후마마께선 전날의 일이 마음에 깊은 앙금을 만든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가야에서 온 약사(藥師)를 움직여 미실을 흔적없이 처리하려 절치부심입니다. 비어 있는 보명궁에 일이 있는 것처럼 동륜태자를 불러 미실과 연결짓는 계책을 모색한다 했으니 장차 왕실이 큰일 아닙니까.”

사도왕후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태자를 불러 미실과 얽히게 한 것도 본인의 솜씨이고 보니 정황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했어도 진흥왕은 궁안의 소란이 모두 자신의 어머니가 꾸민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기에 무엇보다 사태파악에 신경을 쓸 뿐이었다.

“왕비께서도 알다시피 어마마마는 오랫동안 정권의 가장자리에 있으셨습니다. 무엇이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뤄졌으니 조금만 계획에서 벗어나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건 왕비도 잘 알잖습니까.”

“신첩이 어찌 그 점을 모르겠나이까. 한데, 이 번 일은 태후마마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독을 쓰려는 생각을 했겠지요.”

“독을 써요?”

“마마, 선대왕 때 태후께선 옥진궁주로 인해 마음 고생이 대단했지요. 선대왕의 강정을 위해 옥진궁주를 돕던 하마도인(蝦蟆道人)이 미각방을 사용했다 하여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랬지요. 사내의 기력을 돕는 그 비방은 중원의 사천성에서 출토되는 팔각생부자(八角生附子)를 사용했지만, 선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그 이유를 하마도인이 독을 쓴 것이라 여겨 사형에 처했지요. 어마마마는 선대왕이 돌아가신 게 하마도인이 독을 사용한 탓이라 여겼지요.”

“월성의 약사들은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이유인지를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선대왕께선 밥을 먹는 것보다 색을 밝히는 걸 자랑으로 생각했지 않습니까. 그 당시 옥진궁주가 사가로 쫓겨나고 궁주를 돕던 하마도인이 처형된 것은 선대왕의 영면(永眠)으로 태후마마가 득세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일리 있습니다.”

“그 당시 사용한 부자(附子)를 지금 미실에게 다시 사용하려 든다지 않습니까.”

“뭐요?”

왕비는 몇 개의 흙 인형을 가져와 진흥왕 면전에 내놓았다. 그것들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물 모양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 모양이 있는가 하면 뱀에게 쫓겨 달아나는 개구리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있고 덩치가 큰 상어와 고래 모양도 있었다. 왕비는 나비 모양으로 치장된 것을 들어 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마, 이것은 중원의 내명부에서 사용되는 금보요(金步瑤)라는 머리 장식입니다. 제왕의 총애를 얻고자 내명부 여인들이 나비의 뱃속에 미약(媚藥)을 넣어 머리에 꽂기 때문에 여인이 걸으면 새어나온 미약 때문에 제왕의 기력이 크게 흔들려 총애한다 하옵니다. 태후마마는 이 금보요의 뱃속에 미약을 넣어 보명궁에 치장했사온대···.”

“그런데요?”

“금보요의 뱃속에 부자(附子)가 섞여 있다는 보곱니다.”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