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담?’

초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탁자 위를 더듬었다. 그녀가 들춘 책은 중원에선 그런대로 성의학의 비점(批點)을 찍은 것들이었다. 갈홍의 <포박자>를 비롯해 사일학인의 <성사(性史)>, 양상선의 <소녀경(素女經)>과 변동현의 <현녀경(玄女經)>, 그리고 얘기 식으로 엮은 짤막한 몇 권의 책자였다.

자잘한 것은 염담을 위해 준비한 것인지 책표지엔 제목이 없었고 몇 장을 넘기자 약간 굵은 선으로 군데군데 줄이 그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이 책자들은 교양서적이라기보다 은근하고 짭짤한 놀이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동륜태자의 말소리가 한결 느긋해졌다.

“염담은 말이야, 탁자 위에 놓인 서책을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읽는 방법은 염파에게 들었을 것인즉 그리하면 될 일이다. 아무래도 순서대로 읽는 게 좋을 게다. 네가 이런 자리에 처음 나왔으면 그런 훈련을 쌓음도 괜찮을 게야.”

초초가 잠시 살펴보니 책자의 오른편엔 세필로 끄적인 숫자가 있었다. 거기에서 1권을 골라 몇 장을 넘긴 순간 그녀의 낯이 붉게 타올랐다. 두 눈은 경악으로 치뜨여지고 뜨거운 그 무언가가 하복부에 꽉 찬 느낌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일찍이 신라 땅에 빼어난 미인이 있었더라. 고운 얼굴에 눈빛 같은 살결이었으나 나이 열여섯이 되도록 혼처를 구하지 못하였더라···.>

초초가 책을 동안 동륜태자는 침상에 누운 여인을 더듬었다. 그것은 더듬는다기보다 이 곳 저 곳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방사를 치르려는 준비단계라 볼 수 있었다. 남녀는 함께 있으면 서로가 뿜어내는 향기가 있다. 음향(淫香)이다. 사랑에 들뜬 젊은 남녀가 깊은 산중이나 숲속에서 사랑을 나눌 때 특히 조심해야 될 게 음향이다. 서로의 몸에서 풍겨나는 이것으로 인해 독충(毒蟲)에 물릴 위험이 높다. 깊은 숲속에서의 야합은 이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보명궁은 다르다. 번을 서는 화랑들이 있고 실내를 살피는 시비(侍婢)들이 있으니 그런 걱정이 없어 동륜태자는 춘화도를 눈여겨 보았던지 이상 야릇한 체위로 유도해갔다. 그게 뜻밖의 행동이었던지 초초가 읽기를 멈추고 망연히 바라보자 이내 질책이 떨어졌다.

“아니 읽지 않고 뭘 하느냐. 염파가 끈끈한 얘기를 모두 신라로 바꿨다지 않느냐. 여흥을 자르지 말고 어서 읽어라”

비교적 부드러운 질책이었지만 다시 한번 여흥의 맥이 끊기면 고약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눈빛이었다. 초초는 얼른 책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 미인으로 말하면 피부는 소상강에서 출토되는 양지옥처럼 매끄럽고 말소리는 부드럽고 걸음걸이 또한 단아하기 그지없더라. 어느 때 동륜태자께서 이 처녀를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귀한 패물을 주고 미인을 사들였는데 오늘이 그 여인을 사랑해주는 밤이라···.>

초초의 입에서 훅! 비명이 새어나왔다. 비교적 큼직하게 쓰여진 것은 염담꾼이 읽기 쉽도록 배려한 터지만 댓장 남짓 읽고 보니 다음 권으로 연결되었다. 초초는 앞권을 밀쳐두고 다음 권을 펼쳐들었는데 내용이 더욱 요란했다. 서책 속의 어떤 그림은 남녀가 풀밭에 엉키어 있고 어떤 것은 나무 밑에서 또 어떤 것은 방안에서 엉키고 있으니 도무지 뜨거운 피를 가진 초초로서는 그것을 계속 읽는다는 게 고역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염파는 몇 번이나 당부하지 않았던가. 여차직하여 실수라도 있게 되면 초초 한 사람만 죽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염파를 비롯해 초초의 사가(私家) 쪽 가족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물러나갈 수도 없었다. 초초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심호흡을 하고 나서 서책에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목소리에 감정을 불어넣었다.

<···동륜태자는 천천히 여인의 몸을 쓸어갔다. 손 끝에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은 이제껏 여느 여인의 몸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문득 여인의 몸을 뒤집어 등허리의 완만한 곡선을 더듬다가 다시 여인의 몸을 정면으로 뒤엎은 채···.>

무언가 초초의 얼굴로 날아왔다. 언뜻 고개를 드니 동륜태자의 노한 눈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초초를 바라보며 검지 끝으로 창질하고 있었다.

“서책이라는 건 감정이 있게 마련이야. 행동하는 부분은 천천히 읽어야 될 게 아니냐. 여인의 몸을 앞과 뒤로 돌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또 뒤엎은 여인의 몸을 바르게 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야. 그렇게 빨리 읽으면 내가 어찌 행동을 하라는 게냐?”

그제야 초초는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확연히 깨달았다. 미실과 이곳 보명궁에서 성희를 베풀고 있는 동륜태자는 중원의 제왕들이 즐겨 쓴 ‘음수전(淫獸傳)’ 놀이를 인도해 가는역할이었다. 이것은 여인과의 방사를 가상하여 엮은 다음 그것을 염담으로 꾸며 읽게 하는 것으로 보통 궁에선 서책 내용을 궁비(宮妃)로 읽게 하는 묘한 습성이 제왕에게 있었다.

너무 빨리 읽어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되는 바람에 염담꾼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동륜태자가 미실을 돌려세우거나 뒤집는 것은 힘만 들뿐 끈끈한 짓거리의 소득이 없었다.

이런 경우 동륜태자가 행동하기 쉽도록 분위기를 유도해 가는 것이 노련한 염담꾼의 능력이었으나 놀이에 대한 경험이 없는 탓에, 서책 내용을 외운 후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동륜태자의 노기를 부른 것이다.

사실 이런 일에는 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분위기 파악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것을 초초는 그 옛날의 서책에서 읽은 바 있었으나 장난끼가 발동했다. ‘음수전’ 놀이를 통해 그녀는 동륜태자를 골탕 먹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녀는 짐짓 서책을 집어든 채 목소리를 자잘하게 깔았다.

<···동륜태자는 여인의 몸을 쓸어가다 자신의 체중을 천천히 여인의 몸에 실어갔다.>

그 순간 침상 가까이 놓여있던 자리끼의 물이 날아왔다. 물을 뒤집어쓰진 않았지만 초초는 화들짝 놀란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 봐, 자네 눈은 보름달밖에 못 보나. 내 행색을 보라구. 이렇게 속옷을 입고 있는데 무슨 짓을 하라는 게야?”

“죄송합니다, 태자마마.”

“그래, 그래. 죄송하지 않게 처리를 하라니까.

초초는 찔끔 놀라워하며 다시 서책을 집어들었다. 초초의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 그것은 동륜태자의 몸을 끈끈하게 만들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었기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목소리에 풍부한 감정을 실어보내며 언뜻언뜻 동륜태자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 무슨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봤음인지 동륜태자는 겨우 하복부를 가린 옷가지를 팽개치고 미실 곁에 모로 누웠다. 초초의 끈끈한 목소리가 바람처럼 날아왔다.

<···여전히 미인은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유연한 맵시며 양지옥같은 피부를 그대로 내보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동륜태자는 서둘러 미인의 목 아래 손을 집어넣은 채 한손으로 가만가만 미인의 젖무덤을 쓸어내렸다. 뜨겁고 보드라운 물줄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무언가 미인에게 봉사하고 싶었다.>

‘얼씨구!’

동륜태자의 눈길이 초초 쪽으로 날았다. 내심 뒤틀린 심기를 주체치 못했지만 한쪽 팔을 미실의 목 밑에 두른 터이니 당장 어떤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런데 초초는 갈수록 태산이었다.

▲음수전(淫獸傳) ; 중원의 제왕들은 글자에서 보는 것처럼 ‘음란한 짐승’들이 날뛰는 놀이라 하여 매우 즐겼다. 신라에서는 섹스기록관인 스무 살 안팎의 처녀가 맡았다.

  ▲얼굴과 다섯 손가락을 곁들인 용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