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마마의 서찰은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나 소인은 왕실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랩니다. 영흥사 깊은 도량(道場)에 묻혀 주야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읊조리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욕(無慾)을 생각하고 있으니 세상의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일을 생각하면 그 얼마나 조소가 흘러나오며 빈정거림이 있겠습니까. 그런 내가 궁에 돌아간다는 건 생각하기 싫은 일인데 갑자기 차비(次妃)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껴두었다가 광실(廣室)에 욕심있는 다른 계집에게 내리십시오. 왕궁이 내가 있을 곳이면 진즉 살을 비비며 살았던 세종 전군이 눈물로 통사정하지 않겠습니까.>

내용은 정중한 것 같았지만 그 속엔 태후를 조롱하는 보이지 않은 그물(網)이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난다. 그때 어떻게 난국(難局)을 헤쳐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제갈공명은 고비 고비마다 태을신수(太乙神數)를 뿌려 매듭을 헤쳐 나갔지만 방법 여하에 따라 인생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원의 동탁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세상 사람들에게 원망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악행을 저질렀었다. 권력을 잡을 때엔 자신의 시간만 존재한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온갖 폭정(暴政)으로 자신만이 최고인 양 칼을 휘두르던 하(夏)의 걸왕(桀王)이나 상은왕조(商殷王朝)의 주왕(紂王)은 여색을 탐하고 역사를 거슬린 죄명으로 한자(漢字)에서 ‘주(紂)’ 자가 삭제당했다. ‘주(紂)’는 중원사람들이 사용치 않은 죽은 글자다. 정상적인 협상을 않고 그럴듯한 말로 민심을 호도하는 것도 역사의 죄인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기술이 필요하지. 이를테면 호사호(虎蛇狐)라고나 할까. 먹을 거나 이익이 있으면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齒)로 물어뜯어야 하고 남에게 빌렸거나 줄 게 있으면 오늘 준다 내일 준다 징그럽게 괴롭히다 마지못해 쪼가리쳐 내놓고, 자신이 먹을 것은 온갖 좋은 말로 상대를 꼬드기다 자신이 홀딱 주어먹는 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야.”

그래서 힘 있는 자리에 있다 보면 무슨 일을 한다(爲)고 요란을 떠드는 것도 사람(人)이 붙으면 거짓(僞)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 보다 눈만 뜨면 습관처럼 거짓을 연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게 협상의 비결인가? 아니다. 지소태후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치마끈을 풀고 사내들을 불러들였지만 태후가 여는 협상은 여느 정치가나 다름없는 추악한 짓으로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자신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권력의 자리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앞 세대의 군주가 어떻게 죽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어느새 자신도 그를 따라가고 있다. 자신의 세대는 언제까지 시간이 멈추어 있노라고 착각한다. 그렇기에 앞 사람이 저지른 폭정(暴政)을 뒤따라 저지른다. 왜 그럴까? 위정자(爲政者)는 자신의 시대에선 시간이 언제까지 멈춰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살생이나 폭정은 언제나 가능한 엿장사 가위질이라 생각하기에 수많은 부정을 저지르고도 태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늘은 ‘천도(天道)’를 준비시켰다. ‘하늘의 도’다. 인간이 태어나면 그 부모의 공덕(功德)이나 죄업(罪業)을 받는다. 부모의 인생길에 선한 일이 많으면 당연히 후손들은 복록을 받지만 죄업이 많으면 당대에서 일어나거나 대(代)를 건너뛰어 벌이 내린다.

많은 인명을 살상한 자는 그 이상의 참혹한 형벌이 준비돼 있는것을 모르기 때문에 유유자적 거들먹거린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죄 다스림’의 수순은 절묘하여 결코 피해나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업에 태평할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모래시계처럼 일상의 모든 죄업이 하나 하나 떨어져 쌓이므로 결코 피해나갈 수 없다.

지소태후는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섭정의 자리에 앉았을 때 군신 간에 벌였던 협상은 강압적이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로가 좋은 방법을 찾은 게 아니고 오직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협상을 벌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좀 더 좋은 쪽의 결론을 위해 일을 추진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답답한 생각을 지우기라도 하는 양 태후는 다시 한 번 세종 전군을 찾아갔다.

“이보세요, 전군. 이제 에미는 손을 들었습니다. 저승의 아래층에 올라와 있는 내가 무슨 욕심으로 융명(戎明)을 불렀겠소. 모두 전군의 장차를 위해섭니다. 군(軍)은 전군의 아비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으나 조정은 다릅니다. 조정의 실세(實勢)들을 움직이려면 진종 전군의 힘이 아니고선 어렵습니다. 장차 주상이 실각하고 그 자릴 전군이 이어받는다면···.”

“어머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으로 보인 세종이 큰소릴 내지르며 상체를 일으키자 태후는 깜짝 놀랐다. 일단은 좋은 낯으로 부드럽게 본위기를 유도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세요.”

“소자는 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싫습니다. 엄연히 신라는 어머니의 나라도 아니고 대왕의 나랍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유로든 그 자릴 탐내도 안 되며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소자가 그 자릴 보는 것은 반역입니다. 나라에 반역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주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런 것이니 결코 전군을 나쁘다 할 수는 없소. 왕실 사람으로 보위에 관심이 없다는 건 대단한 일이란 생각이 드오. 내가 진즉에 전군의 마음을 알아보고 영흥사에 머무는 그 아이를 부르려 사람을 보냈었소.”

“예에?”

“한데, 맹랑한 것이 전군이 엎드려 통사정하기 전엔 오지 않는다지 뭐겠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면 엎드려 빌어야지요.”

“이보세요, 전군!”

“어마마마, 내자(內子)의 허물이 얼마나 크기에 궁에서 쫓겨나야 합니까. 그 점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 뿐인 줄 아시오. 내가 차비(次妃)로 받아 들이겠다 했더니 정비(正妃)가 아니면 꼼짝도 않겠답니다. 그러니···.”

“그래야지요. 죄 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주어 내쫓았으니 그만한 보상은 해 줘야지요. 소자가 영흥사에 가면 월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만송이의 꽃이라도 깔아두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 아인 칠변화(七變花)를 좋아하니 왕궁에 있는 꽃을 모두 깔아주세요!”

지소태후는 이마를 찌푸리며 횅하니 세종 전군의 처소에서 나가버렸다.

▲주(紂) ; 폭군 주왕. 그의 왕업이 얼마나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는지 그의 시호로 ‘주(紂)’를 내리고 한자 사전에서 주 자를 없애 버렸다.

▲천도(天道) ; 하늘의 도

▲칠변화(七變花) ; 수국을 달리 부르는 말. 지소태후는 미실의 속내를 알 수 없다 하여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표범장식은 무인들이 쓰는 장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