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비담에 대해선 더 이상의 언질을 삼간 채 이 댁 주인에 대해 가볍지 않은 얘길 들려줬다. 지소태후의 아버지는 법흥왕이고 어머니는 보도왕후(保道王后)로 소지왕의 따님이다. 그녀의 어릴 때 이름은 식도부인(息道夫人)으로 처음엔 삼촌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 가 진흥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실공을 새 남편으로 삼았는데 이때 황화공주(黃華公主)가 태어났다. 그 다음으로 이사부(異斯夫)와 정을 나눠 세종(世宗)이 태어난 건 나중 일이지만, 황화공주의 먼 친척으로 숙부뻘 되는 자가 눈치 빠르게 음식을 상납하여 벼슬자리를 얻자 지소태후는 그에게 ‘옹추공’이란 이름을 내리고 자신의 음식을 전문적으로 조리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는 닭 요리를 잘 했는데 태후 주변의 사내들이 며칠 지나면 골골거리는 걸 보다 못해 태어난 지 60일 이내의 닭으로 삼계탕(蔘鷄湯)을 끓여 보신시킨 공으로 양온서 관리에 임명됐었다. ‘닭’과 ‘술’. 이 둘은 함수관계가 있다. 술을 뜻하는 주(酒) 자는 닭(酉)이 물(氵) 마시는 걸 뜻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닭을 술안주로 사용하는 건 모두 ‘옹추공’의 조리법과 관계있는 일이라 여겼다.

“비록 지소태후가 세를 잃고 뒷방에 물러났지만 아직도 중신들 중엔 따르는 자가 많고 어떤 일엔 대왕이 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명을 내리고 있으니 모든 실과(實果)가 떨어진 겨울나무라 할 수 없네. 이곳의 ‘옹추공’이 낙과(落果)를 줍는 기린(麒麟)마냥 바짝 몸을 낮춘 채 웅크렸으니 아직도 ‘옹추공’의 손끝에 실세의 그림자가 오락가락 한다 그 말이네. 해서···.”

미실은 상대의 말을 알아들었다. 월성에 들어가는 첩경으로 ‘옹추공’을 이용하자는 데에 이론이 없었으나 그게 쉬울 리 없다는 걸 여인이 금방 펼쳐놓았다.

“이 댁의 비자(婢子)들 중엔 대부분 가야(伽倻)의 유민(流民)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제 목숨 살리자고 여기있는 건 아니에요. 아녀자의 신분이니 큰소릴 낸다 하여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업(家業)에 따라 시집 가기 전엔 목공예에 솜씨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월성에 들어가면 나 역시 낭주를 도울 수 있을 것이오.”

“한데···, 조금 전 말했던 비담(毘曇)이란 아이 말입니다. 그 아이의 부친이 누굽니까?”

“아마···. 염선생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세한 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이의 발목에 팔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염선생이 아니면 신라 왕족 중 한사람으로 봅니다. 낭주가 그 아이의 양모(養母)가 된다 하여 손해되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또한 칠사를 곁에 두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앞으로 부인을 어찌 부르는 게 좋겠소?”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월성의 소식을 들으니 왕궁이 발칵 뒤집혔답니다. 새주(璽主)에 임명된 미실 낭주가 행방을 감추었으니 무엇보다 미실 낭주를 찾아내 엄벌에 처하라고 지소태후가 난리랍니다. 사도왕후가 극구 변명해 소란이 가라앉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한가위가 가까워졌기에 그친 거지 미실 낭주의 일을 덮어 두려는 게 아닙니다.”

“부인께선 나를 구하실 계책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낭주께서 저와 칠사를 비롯해 비담을 거들어 주신다면 온 힘을 다해 낭주를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약조하시겠습니까?”

“그리하지요.”

“고맙습니다. 이제부턴 낭주를 윗전으로 섬기는 주종관계의 맹약입니다. 저희들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미실 낭주를 배신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안으로는 쇤네가 장량의 계책을 말할 것이며, 밖으론 칠사가 낭주의 신변을 보호할 것입니다.”

“고맙소.”

미실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리고 여인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쇤네 이름은 이미 잊었으나 목공예(木工藝)에 뜻을 두었으니 목부인(木婦人)이라 하십시오. 그리하면 쇤네가 낭주곁에 있더라도 달리 시비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알겠습니다.”

“옹추공이 왕궁에 들어간 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쇤네의 남편이 가야의 명주 왕주(王酒)를 세 병이나 쇤네에게 전한 것은 뜻이 있으리라 봅니다. 소인은 그것으로써 낭주를 월성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옹추공의 마음을 빼앗고 둘째는 왕주를 지소태후에게 전해 마음을 흔들어놓고 셋째는 대왕에게 술을 보내 그 마음을 훔쳐올 것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삼일산을 이용한 ‘무고(巫蠱)의 술(術)’이 있기때문입니다. 지금 아랫것들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연회를 열 차비를 하고 있으니 낭주께서도 준비를 하심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위기 순간을 헤쳐나가는 비법이 눈앞에 있다는 걸 느낀 순간 그녀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목부인은 방을 나가기 전 당부의 말을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돌아가 옹추공을 만나 연회를 시작하면 청동솥을 두드려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간 후 칠사는 방을 빠져나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미실의 보호막이 되었다.

한시각쯤 지나 청동솥이 울리는 소리가 묘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 솥은 먼 거리에 있는 이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징이나 나팔같은 게 아니라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상대에게 밀어를 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옹추 ; 알에서 깨어난 지 두 달이 안 된 닭.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닭을 이용해 삼계탕을 끓였다.

▲비담(琵曇) ; 그가 역모를 획책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건 사실이나 왕실에서 자라나 상대등을 역임하였다.

▲팔찌는 서민들이 쓰던 게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의 소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