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산 본거지로 돌아온 홍경래는 선아를 산채에 맡기고 곧바로 가산 이희저 집으로 내려왔다. 청룡산은 가산과 영변의 중간지점에 있는 큰 산으로 청룡사(寺)라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는 곳이었다. 홍경래는 처음 청룡사에서 우군칙을 만났고 우군칙의 소개로 이희저를 만나 도원결의를 한 곳이기도 했다.

"형님?"

"어서 오시게. 그동안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

이희저는 홍경래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맞은 후 상석을 권했다. 그러나 홍경래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양보했다.

이희저.

이희저는 가산 관아의 관노출신으로 아전들과 결탁하여 가산과 박천 시장에서 수완을 발휘 큰 재물을 모은 전설적인 사내였다. 이희저는 모은 재물로 면천이 된 후 가산 박천 일대의 가장 큰 물상객주를 열고 스스로 무과에 응시 급제를 하는 등 지역의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희저는 홍경래보다 몇 살 위로 형님아우 하는 사이였다.

역사가 말하는 홍경래의 난에는 두 명의 탁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희저와 김사용이다. 그들 중 이희저는 학자들에 따라서 홍경래보다 이희저의 난으로 해야 맞다는 연구까지 할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실록과 순문영등록 등에는 난의 수괴를 놓고 홍경래와 이희저가 맞서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간 진행된 건 좀 있습니까?"

"하하, 이사람, 숨 좀 돌리고 하세나? 누가 쫓아오나?"

"하하, 그런가요? 그럼 차나 한잔 주시지요."

홍경래와 이희저는 자리에 앉고서야 서로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때 방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대인들께서 먼저 자리하셨네요?''

"어 김초시, 어서오시요?"

이희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기는 사람은 김창시였다. 홍경래도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김창시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 덮죽 큰절을 올렸다. 그는 박천 출신의 선비로 사마시 복시를 통과한 인재였다. 복시 통과자는 한양의 궁 안에서 보는 과거의 본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복시를 통과한 자는 생원, 진사로 불리는 만큼 실력이 검증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군,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김창시가 홍경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관노출신의 이희저, 상인 출신의 홍경래를 대인 또는 장군으로 깍듯이 대우할 정도로 반상의 구별을 극복한, 깨어 있는 양반이 김창시였다. 김창시는 홍경래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던 사냥개였다. 홍경래 조직의 5할을 만든 사람이 우군칙이라면 나머지 5할을 만든 자가 김창시라 할 정도로 수완이 뛰어났다.

"참, 군칙이 허낙생에게 엎어치기를 당했다면서?"

이희저가 보루를 손으로 치며 빙그레 웃었다. 김밀수와 정운창의 어젯밤 대국을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하, 군칙이 그 일로 열이 몹시 받아 있습니다. 허낙생을 조질까봐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으하하, 그 성질에 화가 날만도 하지. 아우, 군칙이 보거든 한판 더 하라고 하시게."

"네에? 상대가 정국수입니다."

"아우 나도 아네. 바둑의 신, 정운창을 왜 모르겠나? 그러나 아우, 정운창은 퇴물일세. 한양에는 그를 능가하는 고수가 여러 명 나왔으니까."

“퇴물이라고요?"

"퇴물이까 허낙생 같은 허접한 물주를 물고 있는 거 아닌가?"

이희저가 홍경래와 김창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듣고 있던 김창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대인, 정운창을 이길만한 고수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인지요?"

"있지요. 있다마다요. 아우?"

이희저도 김창시에게는 예의를 다했다. 양반이란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대의를 좆아온 사람이라 해도 지켜줄 것은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이희저였다.

"네 형님,"

"김밀수 말이야."

"그 친구도 대단하더군요. 별로 밀리는 것 같지 않던데요."

"맞네. 김밀수가 다시 한판 두게 되면 절대 지지 않는다 하더군."

"네에?"

"그 친구를 한번 더 믿어보게. 군칙에게 판돈을 몇 배 올려서 재대결을 해보라고 하시게. 잃은 군자금을 보충해야 할 거 아닌가?"

"호! 그럼 담배 천오백 근 내기가 되겠군요."

홍경래가 자신의 양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방안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들어 왔다. 차와 다과를 담은 상을 들고 노복들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