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끝났다. 어느새 동이 훤하게 튼 아침이었다. 홍경래는 앙앙불락하는 우군칙을 앞세우고 정주읍내의 한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모는 아침에 찾아온 손님들을 반기며 주문을 청했다.

"얼큰한 콩나물국하고 밥 한술씩 주쇼. 앉아들 서 있지 말고?"

홍경래는 선아를 옆자리에 앉히고 일행을 정리했다. 모두 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우군칙은 홍경래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얼굴이 불그락했다. 담배 5백 근을 거저(?) 먹으려다 오히려 잃은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자네도 이리와 앉게. 바둑 두느라 애 많이 썼고."

홍경래가 패배의 쓴맛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밀수를 불렀다. 빠진 하관이 하룻밤 사이에 한치는 더 길어진 듯했다. 고수들의 무한 힘겨루기였다. 투전꾼의 자존심이 걸린 대국이었고 대국에는 물경 담배 5백 근이 걸려있던 판이었다.

"저...."

"앉아. 수고했어. 자네 바둑도 보통이 넘더군?  하하. 임자 잘못만났다 생각해."

홍경래는 김밀수의 등짝을 두드려주며 위로를 했다. '기효신서'에는 이기는 자가 있기에 패하는 자도 있다고 했다. 다만 이기는 전쟁을 하는 자와 지는 전쟁을 하는 자가 있기에 전쟁에 나선 장수는 따지고 또 따져봐야 한다고 한다. 전쟁에 패한 장수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건 중과부족의 전쟁이 그것이란 것이다.

"나는 산채로 돌아갈건데 군칙이 너는 어쩔거야?"

"용천에 물건을 받으러 가야합니다. 참, 형님, 가실 때 저 친구 가산에 부려주고 가시죠?"

우군칙이 김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이희저의 식객으로 기숙하고 있었다.

"그러지. 가산을 지나가야 하니까. 어쨌든 정운창을 이곳에서 본 것은 좋은 구경이었어. 자, 선아야 밥먹자. 니가 날새느라 고생했구나."

홍경래는 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홍경래는 무술의 고수였다. 검술과 권법의 달인인 그가 바둑으로 조선 제일의 고수로 불리는 정운창이 달리보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이서구는 기자소전(傳)을 지으며 정운창을 집중 조명했다. 당대의 고수 김종귀를 무너트린 정운창은 그와의 아름다운 우정도 쌓는다. 정운창의 인기가 한양에 퍼져나갈 때 김종귀가 정운창을 불렀던 모양이다. 눈오는 밤이었다고 한다. 김종귀는 술상을 잘 차려놓고 정운창을 맞이한다. 김종귀는 나이 차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손수 칼을 들고 고기를 썰어내며 말한다.

"선생은 현명하고 호걸입니다. 혹시 이 술잔의 의미를 아시겠는지요? 제자가 감히 묻습니다?"

김종귀는 패자로서 모든 예의를 다한다. 승부에 패한 패장은 유규무언이다. 정운창은 몸들 바를 몰라하며 대꾸를 한다.

"소인은 공께서 주시는 정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공의 명성은 한시대를 드날려 당대의 공경들과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소인이 운좋게 이겨 공과 동렬에 섰지만 공의 가르침을 언제나 기다릴 뿐입니다."

김종귀는 덥썩 정운창의 손을 잡고 말한다. 아직 할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소이다. 제자가 일찍이 바둑을 배워 명성을 독점하여 많은 고관들의 부름에 응한지 십년이 됩니다. 이후 선생을 만나 패한 후 고관들의 눈길이 온통 선생에게 쏠리니 제자는 이제 반열에도 끼지 못합니다. 어찌 제자가 선생께 다시 도전을 하겠는지요?  그저 선생께서 조금 양보를 하셔 제자의 예전 명성을 조금이나마 유지케 해주시지요?"

일세의 고수가 김종귀라면 조선의 고수는 정운창이었다. 정운창은 17세기 바둑의 귀신으로 불리던 김종귀를 이렇게 철처히 무너트리며 국기(國碁)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한 고수는 바둑의 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운창은 전설의 고수 김종귀를 단숨에 무너트리지 않았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정운창과 홍경래의 조우를 의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홍경래는 정운창의 바둑을 옆에서 지켜 보았었다. 근거를 대라면 못댈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