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께서 정감록을 특별히 혹세무민하다 하셨는데 충청 경기도가 심했소이다. 그 당시 평안도를 걱정하시는 말씀도 하셨지요."

김조순은 수라간 궁인들이 가져온 상을 받으며 말했다. 영조실록(영조 27년 1741년)은 실제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 평안도에 인사와 사리에 밝은 자가 가담하여 수호전의 양산박을 만들까 걱정된다.

18세기 서북지역이라 일컫는 평안도는 역동의 지역이었다. 중앙의 차별과 수탈 등으로 핍박받고 헐벗은 지역이란 인식은 역사를 바라보는 착시가 가져온 현상일 뿐 실제는 전혀 반대였다.

함경도 지역은 사실 한국의 역사에 편입 시기에서 경기 삼남 지역들보다 불리한 여건이었다. 고려시대 등 어느 때는 우리의 역사에서 분리(?)된 적도 있었다. 조선에 들어와 함경도가 경기 삼남 지역과 경쟁을 하며 차별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고, 대청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산업이 파괴되며 곤경을 치루다 18세기에 오면서 함경도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대청 전쟁이 끝나고 평화기가 계속되면서 청나라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이 강점으로 작용하여 서북지역은 대청 무역의 전진 기지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경기 삼남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사대부 계층이 적었던 탓으로 상인층과 각종 물화를 생산하는 장인층의 활발한 활동이 지역의 경제여건을 강화시킨다. 함경도 44관(官) 곳곳에 상업으로 부호가 된 사람들이 유력자로 성장하고 그들의 합종연횡이 평안도를 8도 중에서 물상이 가장 풍부한 고장으로 만들게 된다.

정약용은 평안감사의 세식(歲食)이 24만 냥이라 했다. 그 중에 12만 냥이 감사의 녹봉이니 이 중 8할을 국고로 해도 감사 녹봉이 2만 냥이냐 된다며 평안감사 자리가 노른자(?)라 비꼰 바 있었다.

김조순은 그의 문집 '풍고집'에서 '관서는 대번(大藩)이다. 재화가 나라 안에 으뜸이다. 재상들이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원하는 자는 모두 이 자리를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안감사의 연회를 그린 그림들 속에 왕실의 그것과 견줄만한 장면들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평안도 지역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부원군 대감, 서북에 기찰 포교들을 보낼까 합니다."

박종경이 말했다.

"나라 안이 어수선한데 서북에 기찰을 풀어 민심을 동요시킬 필요가 있겠소?"

"은밀하게 하겠습니다. 대감, 서북은 위험한 곳이올시다."

박종경이 지역성을 들먹이며 말했다. 서북지역은 국경지역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그곳 백성들의 기질이 호전적이고 급한 것도 변화무쌍한 국경 지역의 환경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형판, 그것이 바로 지역 차별이오. 오늘날 서북인들이 조정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김조순이 박종경을 탓했다. 두 사람은 당대 조정의 실권자로 시파의 핵심이었다. 그들은 힘을 합해 심환지 이서구 등 벽파의 핵심을 몰아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사이에도 서열이 있었다.

"느낌이 영 안 좋습니다. 대감도 저의 느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알지요. 당신의 동물적인 육감을 왜 모르겠소? 자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

김조순이 박종경과 이효헌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김조순은 정조 시절부터 지금의 왕에 이르기까지 서북지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김조순은 평양에 있는 '기자'와 '단군'의 사당인 숭인전과 숭령전의 책임자로 지역인을 발탁하고 임기가 끝나면 중앙으로 끌어 주어 평안도민이 갖고 있는 조정 진출의 욕구를 풀어주는 등 유화책을 쓰고, 평안도에 부과된 환곡 세원을 3분의 1로 줄여 주는 파격적 조치를 내려 그곳 사람들에 감동을 준 바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역사의 부조화를 만난다. 김조순은 안동 김문의 조종이며 서북인을 탄압하고 수탈하여 홍경래난 등을 유발한 세도정치의 원흉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기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을 본다. 역사는 결과를 예단하지 않는다. 홍경래가 서북지역에서 군도를 이루어 무엇인가를 꿈꾸던 1809년 순조의 장인이자 정치적 실세였던 김조순의 실제적 모습은 친 서북적이고 친 애민적이다.

"부원군 대감?"

"형판, 너무 옭죄지 맙시다. 지나친 단단함은 좋지 않아요. 슬금슬금… 여유있게… 술도 천천히 풍류하며 마셔야 맛이 있지 않소?"

여유를 말하는 김조순은 정조에 의해 세자의 후견인으로 낙점을 받은 사람이다. 정조 7년 김조순이 21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하여 출사를 하자 정조는 청풍의 현손이 왔다 하며 기뻐하고 김낙순(洛淳)이란 원래의 이름을 조순으로 바꾸어 주고 '풍고'라는 호를 지어준 비범한 인물이었다.

김조순은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다. 김상헌은 조선 후기 사대교린하던 조선 지성사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퇴계 율곡을 뛰어 넘는 명품(?)이었다. 김상헌가(家)는 김수항, 김창업 등으로 이어져 오며 가문(家門)이 시대의 화두가 된 시점에서 조선의 가장 명망가로 인식되어 있었다.

반청 의지를 끝까지 꺾지 않았던 김상헌과 누각에서 분신 자결을 하며 반청 의지를 표현했던 김상용 형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가져다준 시대의 주목이 드디어 김조순에게 이어졌고 이점을 주목한 정조는 김조순을 정치 파트너로 삼아 어린 세자의 앞날을 맡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