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고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사람인 거 같아. 당파의 영수이자 세도정치의 본산 그리고 시대 문원의 좌장까지 말야."

"조선 안에 안동김문이란  작은 나라를 세운 사람이니 안 그렇겠어?"

"호호, 과장은... 나는 말야 풍고보다 김려가 더 궁금하더라."

지옥심이 '김려'를 말했다. 지옥심은 18세기 전공자답게 당 시대의 문원(文苑)에 깊은 공부가 있었다.

"무엇이? 김조순과 김려는 동문수학한 친구 아니었나?'

"그래. 그 두사람이 봉원사에서 기숙을 하며 글도 쓰고  공부를 함께 했잖아."

"그래서?"

김산이 장단을 쳤다. 그들의 만남은 늘상 이런 식이었다. 관심사에 너무 몰두하다 사랑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가 그들이었다. 김산은 5년 전에 아내와 사별을 하고 아들 '도인'이와 살고 있었다.

김려는 조선후기의 문인이다. 벼슬은 변변치 않았으나 오랜 유배생활을 통해 많은 작품을 남겨 조선문인의 조명을 받고부터 조금씩 알려진 인물이다. 21세기에 들어서 각광을 받고 있는 한문학자 '안대희'는 김려를 이렇게 평가한다.

- 김려의 문학은 조선왕조의 전통적 유가 이데올로기나 문학적 가치로부터 탈피하여 현실 사회의 실상을 담고자 했다. 그의 시와 신문에 일관하는 주제는 버려지고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김려는 자신이 경화사족이면서 불우한 인생역경을 경험한 사대부로서의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안대희 작, 조선의 산문문학.

"두 사람이 정말 친한 친구였다면 풍고는 왜 비참한 생활에 놓여 있던 김려를 보살펴 주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 말야."

"하하, 친구라 해서 모두 챙겨야 한다면 당시 풍고는 조선의 군왕이여야 하지 않았을까?"

"뭐라고?"

"안 그래? 당대의 권력가에게 친구가 한두 명이었겠어?"

김산은 대화가 너무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침몰(?)을 막기 위해 농담조로 대답을 했다.

"또 장난친다. 조금 진지해질 수 없어?"

"댁은 다 좋은데 너무 학구적이라 탈이야."

"호호 학구적인 사람 다 죽어겠다."

"하하. 우리 이러지 말고 윤선생에게 전화 한번 더 해보고 바닷가라도 가보자고."

"바닷가?"

"월미도가 여기서 멀지 않잖아. 전화 안 받으면 메세지라도 남기고 기다리면 연락오지 않겠어?"

김려가 지옥심의 손전화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어. 월미도가 가까운가?"

"택시타면 잠깐일 거야. 내가 택시 잡을께."

김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택시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십여 대의 개인택시들과 영업용 택시들이 줄을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김선생? 잠깐...."

"왜?"

"잠깐만 이리. 이게 뭔 소리래?"

지옥심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손전화를 든 손이 떨고 있었다. 자세가 몹시 불안정했다.

"뭐야? 왜 그래?"

김산이 지옥심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윤선생 전화를 형사가 받았어. 형사가 잠깐 기다리래?"

"뭐야?  형사가...."

"윤선생이 죽었다나 봐."

".... ...?"

지옥심의 말에 김산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윤필수를 만나러 인천에 온 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을 떠나 괴기스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