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사는 개화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리고 일본은 어떤 나라라 보세요?"

민비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는 민응식에게 두 가지를 한꺼번에 물었다.

"네에...소신이 어찌 그런 것을 알겠나이까? 설사 조금 안다해도 마마의 귀를 어지럽힌단 말이지요."

"민진사. 이곳이 어디인지요? 남한강의 작은 마을 아닌가요? 한양에는 한양의 법이 있겠으나 향촌에는 행촌의 법이 있는 법, 개의치 마시고 말해 보세요."

"그러하시다면 한말씀 올리겠나이다. 개화는 필요하나 그것을 일본을 통해서 한다면 안된다고 보옵니다."

민응식이 거듭된 민비의 재촉에 답변을 했다. 민응식은 한미한 시골의 고루한 선비였다.

"호호, 일본이 왜놈이라서인가요? 천명을 한번에 나르는 배를 만들고 수천 보를 나가는 대포를 만드는 나라가 일본인데도 그들이 왜놈이라서 안된단 말인가요?"

"그건......"

"왜놈의 정의가 뭐죠?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서요? 인의예지는 고사하고 변변한 문장 하나 모르는 무지한 족속이라 그런가요? 민진사 이걸 한번 더 보실래요?"

민비는 백지 한장을 서언에 올려놓고 붓을 들어 시 한수를 써 내려갔다. 단 두 문장에 불과한 짧은 한시였다.

꼭두서니 빛 자치꽃. 들녁의 금원(벌판)에 서서

들판을 지키는 사람들 보다가 당신 소매 흔드네.

-만엽집

만엽집에 나오는 이 시는 한문과 고대 일본어로 되어 있어 한문과 고대일본어 그리고 현대 언어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시다. 단가(短歌)의 백미라 하겠다.

"이것이 일본인의 작품이란 말인지요?"

"호호 맞네요. 그것도 일본 군왕의 작품이지요."

"천황이라고 한다는 일본왕 말인지요?"

"맞아요. 일본왕이 지은 작품이지요. 그것도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백제시대를 살던 왕 말이에요."

민비는 한시를 쓴 백지를 방바닥 위로 내려 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묵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민비가 말하는 일본군왕은 천무(天武) 천황을 말한다. 천무는 죠메이와 샤메이 사이에서 난 왕자로 청년시절 '아스카'의 법흥사에서 있었던 축국연(蹴鞠宴)에서 의기투합한 '가마타리'와 손을 잡고, 당대의 세도가문인 '소가씨'를 제압하고 '고교쿠' 천황을 퇴진시킨후 다이카시대, 즉 대화시대(大和時代)를 연 역전의 용사다. 천무천황은 일본사에서 전쟁의 신(神)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천무는 가마타리가 내준 수십 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소가씨의 막강한 군영을 습격하여 소가씨의 지휘부를 일거에 제압하는 군사작전을 성공시킨다. 이때가 646년이니 백제로 따져보면 의자왕 말년으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최상으로 좋을 때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축국연' 이다. 25사에 기록된 백제에 투호 저포 축국이 흥했고 특별히 바둑을 유행했다는 기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