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술자리로 회포를 푼 김옥균은 운종가 이규완의 점방에서 고대수를 만났다. 고대수는 궁안에서 바둑 잘두기로 소문난 궁녀였다. 그녀는 이규완을 바둑 스승으로 여겼기에 김옥균을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개화 선각자로 이름이 높았고 더구나 이규완의 주군인지라 더욱 그랬다.

"고상궁께서 나를 이리 생각해 주시니 반갑고 고맙소이다."

김옥균은 듣던 대로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가 장승같은 고대수를 보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한양의 선남자로 불리는 선생을 만나뵈니 꿈만 같나이다. 항상 이국기(國碁)를 통해 선생의 소식을 들으며 사모하고 그리워했지요."

고대수가 말하는 '이국기'는 이규완을 말한다. 조선은 바둑의 최고수를 '국기'라 불렀다.

"하하하, 지밀에 바둑 잘두고 힘을 쓰는 여장부가 계시다 하더니 허언이 아니올시다."

김옥균이 무릎을 치며 고대수를 반겼다. 헌헌장부의 기개에 입심까지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김옥균은 한 물건을 만난 듯싶었다.

"제가 비록 아녀자지만 개화당을 마음에 두었었고  오늘 그 당의 영수를 뵈니 감읍할 뿐이지요."

고대수는 그리 말하면서 보자기에 싸들고 온 책을 한권 꺼내 놓았다.

"이건?"

"조선책략이지요. 중국사람 황준헌은 영수와 비슷한 분이더군요?"

"뭐요? 내가 황준헌과 비슷하다고요?"

김옥균은 자신을 황준헌에 비교하는 고대수의 말을 듣고 뜨금했다. 황준헌(1848-1905)은 중국이 자랑하는 젊은 지식인이다. 황준헌의 이력은 자못 엄청나다.

황준헌은 담사동, 양계초, 강유위 등 19세기 후반의 문학의 변혁을 주도하는 신문체운동을 주도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쇠퇴하던 청왕조의 중국통치 방법인 문자옥(文字獄)으로는  더이상 한족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일단의 에리트들이 시계혁명(詩界革命)을 주도했고 선봉이 황준헌인 것이다. 담사동 양계초는   사족이 필요치 않은 대학자다. 황준헌을 잘 표현한 글이 한편 있다. 내 손은 내 입을 받아 쓴다(我手寫我口)는 시(詩)다.

속된 사대부는 엣날을 존중하여/ 날마다 옛책을 연구하여/

육경의 글자를 극진히 받들고/ 시경의 시들을 황송해 한다./

옛사람이 내다버린 것도/ 보기만 하면 어쩔 줄 모르며/

열심히 본받고 표절을 하니/ 지은 글도 모두 옛글의 모방이지/

사람이야 모두 황토로 빚은 것/ 어느 시대까지 올라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