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 국수의 눈 / 기세의 타이밍과 진중함의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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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 국수의 눈 / 기세의 타이밍과 진중함의 부족

2006-09-18 프린트｜스크랩

9월 11일 제8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베이징대회 개막식 대진추첨에서 부전티켓을 뽑은 한국선수단장 김인 9단은 ‘추첨을 잘 해서 반 승 정도는 앞서게 됐다’는 주변의 축하인사에도 불구하고 썩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일단, 중일전을 보고 이쪽 선수를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승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무엇인가 언짢은 예감이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13일 베이징대회 두 번째 대국에 출전한 조훈현 9단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상대는 12일 개막전에서 중국의 왕레이 9단을 꺾어 기세가 충만해진 일본의 선봉장 하네 나오키 9단. 저급한 말 장난이라고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있겠지만 기자들 사이에서는 ‘하네가 농심 신라면배에선 제법 하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하네 9단의 농심 신라면배 성적은 다른 국제전 성적에 비해 꽤 좋은 편이다. 김 9단은 언짢은 예감을 이렇게 풀이했다. “내가 추첨을 잘 못한 것 같아. 조 국수는 이번에 단단히 벼르고 1장을 자처했을 텐데 개막전을 놓쳐서 김이 좀 빠진 느낌이거든. 기세나 투지가 한껏 올랐을 때 승부에 임해야 하는데 말야···.그게 아쉬워.”

서유기의 한 장면 손오공과 천상의 복숭아를 연출해 대국자를 결정한 개막전 추첨식은 나름대로 신선하고 재미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한국의 부전이 결정되는 바람에 조 9단이 기세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 마치 목표물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아야 할 순간에 누군가 옆에서 ‘좀 이따 다시 쏘시지?’라고 말해버린 꼴이라는 얘기다. 대국 내용이 그 예감을 웅변했다. 흑을 쥔 조 9단은 초반부터 특유의 속력행마로 발 빠르게 실리를 확보하며 앞서 나갔다. 검토현장의 정상급 기사들도, 서울에서 이 대국을 해설한 이세돌 9단도 ‘흑의 흐름이 좋다’며 조 9단의 무난한 승리를 예고했다. 특히, 대국 전 ‘조훈현의 55 : 45 우세’라고 진단한 일본 검토진도 예상대로의 진행임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변화는 우변에서 시작됐다. 서릿발처럼 매서운 조 9단이 손길이 무뎌지는 순간 하네 9단이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믿을 수 없는 절차를 밟아 흑의 세력권이었던 우변이 유린되면서 ‘흑의 무난한 승리’를 향하던 승부는 혼돈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는 아수라장, 한치 앞도 내다 보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조 9단은 종반까지 이어진 좌변, 좌하귀, 좌상귀의 접전에서도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몇 차례의 실착을 범하며 승리를 놓쳤다. 예감의 결과는 조 9단에게도, 한국팀에게도 혹독한 것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신의 몫’이라는 반집의 패배였다. 달아오른 얼굴로 대국장을 빠져 나와 검토실로 자리를 옮긴 조 9단은 스스로 복기를 시작했다. 김 9단과 목진석, 최철한 9단이 배석해 주요장면마다 의견을 교환했는데 조 9단은 우변에서 특히 후회가 컸다. 바둑판 위에 알기 쉽게 수습하는 그림을 여러 개 그리다가 흩어버리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우변 처리에)심각하지 못했어요. 심각해야 했는데···.”

한 손으로 턱을 조 9단은 복기를 마칠 때까지 이 말을 몇 차례나 반복했다. 백이 우변을 돌파하는 순간에도 우변 수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충분히 앞서 있다’는 낙관도 실려있었을 것이다. 하네 9단이 좌상귀에서 수를 내 1선으로 건너가버린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흑이 승리하는 길로 검토됐던 좌변, 좌상귀의 끝내기 수순들은 오랫동안 ‘조훈현의 전공과목’으로 불리던 것이어서 더욱 아쉬웠다. 중국기원과의 약속이 없었더라면 조 9단의 복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개막전 무대에선 ‘내가 1장으로 나서게 된 것은 중국의 우승을 위한 배려’라며 소탈하게 웃었지만 그 마음 속에는 와일드카드 출전, 1장 자원으로 이어지기까지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승부의 투지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9단은 그래서 더욱 아쉽다. 패배의 원인은 많다. 승부처의 집중력이나 끝내기의 정밀도에서 조 9단의 전성기와는 분명 다르고 약간의 낙관도 작용했을 테지만 김 9단이 꼽는 첫 번째 패인(敗因)은 ‘조 국수가 간절하게 두고 싶을 때 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템포 늦춰진 대국이 조 9단이 팽팽하게 조여두었던 승부의 리듬을 헐겁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프로 정상의 단판승부는 가진 기량의 차이보다 승부 당일의 기세와 투지, 심리적 안정 같은 관념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말이 정설에 가깝다. 이 패배의 여파는 최철한 9단에게로 이어졌다. ‘조 국수님이 1승만 거두면 베이징대회에서 내가 출전할 일은 없다’는 게 최 9단의 속내였고 그건 현지의 거의 모든 관전자들이 공감한 기정사실과 같았다. 조 9단의 패배가 확정된 뒤 하루의 여유가 있었지만 놓아버린 마음을 다시 승부로 옭아매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관념의 문제는 시간의 여유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싸울 생각이 없던 선수가 워밍업도 없이 글러브를 끼고 링 위로 올라간 셈인데 최 9단의 상대는 하네 9단의 3연승을 저지하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펑첸 7단. 한쪽(최철한)은 ‘믿었던 조 국수님이 졌으니 나라도 1승을 거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고 다른 한쪽(펑첸)은 ‘1승을 거둬 내 몫은 했으니 이제부터는 편하게’라는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출발했으니 어느 쪽이 심리적으로 불리한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초반의 우세를 끝까지 이끌지 못하고 역전패한 대국 결과는, 최 9단의 개막식 임전소감 중 몇 마디를 예언(?)으로 만들어줬다. “농심 신라면배에는 세 번 출전했는데 첫 번째 3승, 두 번째 2승, 세 번째 1승을 거뒀다(그럼, 이번에는?).” “···(중략) 이창호 9단은 존경하는 기사다. 이 9단에게 잘 버텨서 좋은 평가를 받는데 사실, 중국 기사들에게는 잘 져서 팬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는다.” 김 9단은 베이징 체류기간 내내 한국 신예들의 지나친 자신감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몇몇 신예가 이창호를 몇 번쯤 넘어서니까 이제는 거의 모든 신예들이 프로 정상과의 거리를 너무 짧게 본다는 것이다. 프로의 승부에서 자만은 치명적인 적이다. “젊은 친구들의 자신감은 좋다. 승부에서 자신감은 반드시 필요한 덕이니까. 그런데 그것이 과하다는 게 문제다.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는데 하네 나오키 같은 일본 프로가 나오면 ‘하네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동안 국제전에서 성적이 나빴다고는 해도 일본의 최고 타이틀 기성(棋聖)을 쟁취했던 정상의 기사인데 무작정 그런 자신감을 갖는 건 위험하다.” 김 9단은 한국의 신예들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자신감에도 높은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계정상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게 김 9단의 생각이다. 그는 승부를 바라보는 젊은 프로들의 눈이, 그 마음가짐이 좀더 진중해지기를 바란다. 승부에 임하여 어떤 상대도 경시하지 않는 진중한 마음가짐. 그것은 세계가 칭송하는 ‘이창호의 미덕’이기도 하다.

개막 전 합동기자회견에서 이창호 9단은 ‘어떤 기풍을 가진 기사가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보는가’라는 우문(愚問)에 ‘기풍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승부처에서의 집중력, 대처능력이 관건인 것 같다’는 현답(賢答)을 줬는데 같은 질문을 받은 구리 9단과 하네 9단은 입을 맞추듯 ‘이창호의 균형’을 이야기했다. 일찍이 우칭위엔 선생이 갈파한 ‘바둑은 조화(調和)’라는 금과옥조(金科玉條)가 아니더라도 정상을 활보하는 프로라면 누구나 ‘승부의 요체는 균형에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승부의 리듬이 파도처럼 춤추는 전장(戰場)에서 끝까지 그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징대회를 가장 빛낸 기사는 일본의 하네 9단이었다. 스스로 ‘나는 안 된다. 균형력은 이창호에게 뒤지고 공격력은 구리보다 약하다. 열심히 배운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둘 뿐’이라고 겸허한 임전소감을 밝혔던 하네 9단은 일본 선봉을 자원해 중국의 왕레이 8단을 꺾고 두 번째 대국에서 조 9단과 맞섰다. 성실한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대국 초반의 기로에서 20여분을 쏟아 붓는(제한시간 1시간짜리 대국에선 이례적인 장고) 진중함을 보인 하네 9단은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가 인정한 거장을 반 집으로 따돌리는 짜릿한 승리로 일본에 연승을 안겨줬다.

조남철시대를 마감하고 조훈현시대로 이어지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국수의 눈에는 그런 하네 9단의 진중함이 더없이 아름답게 비쳤을 것이다. 국수는 베이징대회에서 두 가지를 아쉬워했다. 그 하나는 조 9단의 기세가 충만했을 때 대국에 임할 수 없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 9단이 초반의 우세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해 역전패한 것이다. 첫 번째가 운의 작용이라면 두 번째는 진중함의 부족.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노국수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교훈으로 삼자’는 말은 두 번째였을 것이다. 길은 멀다. 3차대회 중 이제 한 고개를 넘어섰을 뿐이다. 한번의 패배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비난도 지금은 바람직하지 않다(우리는 대체로 너무 빨리 끓고 너무 빨리 식는다). 그러나 한국이 15년 이상 세계정상을 지켜온 것은 기량의 압도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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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장만

｜ 2006-09-18 오후 3:1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