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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바둑과 검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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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숙제처럼 따분하고 견디기 힘든 그런 바둑도 있다.
LG배 세계기왕전이 있던 지난 주 목요일. 이창호 9단과 이세돌 3단의 결승 2국. 늦은 아침을 먹고 LG 인터넷 생중계나 즐길까 하는 마음에 게으름을 마음껏 피웠다. 그러나 참지 못해 대국장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다다르니 오후 3시.
예상대로 검토실엔 기사들과 신문기자,인터넷과 TV의 해설자와 진행자로 가득하다. 눈이 먼저 멈춘 곳은 4개의 폐쇄회로에 잡힌 바둑판. 백1을 둔 오늘의 기보가 바로 그 순간의 반상. 반상에 잡힌 심정은 두 눈 크게 뜬 철없는 표정. 뭐야? 진행이 저거밖에 안되었나? 기계처럼 따라오는 건 형세판단의 버릇. 음,이건 몇 집? 두터움은? 백이 약간 좋나? 아주 어려운 바둑인데! 물어봐야겠는데! 고개를 휘둘러본다. 프로들이 어느 구석에서 검토에 열을 올리고 있나 하고.
어? 다들 뭐하고 있지? 기사들은 많았건만 그저 TV를 바라볼 뿐 열성적인 검토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왜? 하는 의문도 잠깐. 필자 역시 가벼운 일상의 대화에 빠져든다. 누구와 대화하였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제1국과 달리 그 날은 왜 숨찬 검토가 없었을까? 물론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깊고 넓은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답을 주었다. 별로 말할 게 없잖아? 중앙이 몇 집인지 누가 알지? 뭔가 말하려면 시간이 좀더 흘러가야 할 걸? 해설자도 괴롭겠군. 맞아. 약간은 난감해하더군. 서로가 그저 한 칸씩 둔 평범한 바둑이니까. 지난 1국은 돌의 생사가 걸려서 날카로운 맥도 눈에 보이고 긴장감도 높았지만. 검토실도 해설자도 동기부여가 크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런 바둑도 있다. 시간이 흘러가야만 하는,그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그런 바둑이 있다. 눈에 띄는 실수란 보이지 않고 평범한 한 수 한 수가 반상의 삶을 엮어 가는 그런 바둑이 있다.
평범함과 화려함의 차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화두였던 그 날 저녁 어느 후배가 진지하게 던진 말이 바둑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인내의 내면을 보여준다. “건조하지만 저 바둑 역시 우리가 공부할 ‘바둑’의 ‘하나’겠지요.”
(문용직 프로4단 2003.03.04)
▶ 관련기보는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2국, 이창호 9단과 이세돌 3단의 대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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