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의 승부 - 어색한 학생 -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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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월 3일)
- 5년간의 승부 - 어색한 학생 -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저녁 8시 23분.
해가 바뀌었다.
하긴, 지난 달 22일 동지冬至에 이미 팥죽을 먹었으니 나이야 그 때 한 살 더 먹은 것으로 해도 좋으리. 새로운 해도 동지에 시작된다. 그리 보는 시각도 있다.
1985년은 바둑계에 또 하나의 시작을 안겨 주었다.
85년 6월 22일 스포츠서울이 창간되었다. 스포츠신문史의 한 획을 그은 신문.
그 날 바둑계에도 새로운 기전이 탄생되었으니 바로 프로신왕전.
잠시 살펴보면,
1956 국수전 - 동아일보
1959 패왕전 - 서울신문
1959 최고위전 - 부산일보
1966 왕위전 - 중앙일보
1968 명인전 - 한국일보
1974 기왕전 - 조선일보
1975 국기전 - 경향신문
1980 바둑왕전 - KBS
1982 제왕전 - MBC
1983 대왕전 - 대구매일신문
1983 박카스배 - 매일경제신문
1985 신왕전 - 스포츠서울
프로 신왕전은 35세 이하, 五段 이하만 참가하는 독특한 기전이었다.
전체 기사 87명 가운데 32명이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로 보아 당시에 - 언제나 대부분 그러하듯이 - 젊은 세대가 뚜렷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을 알겠다.
개회사에 “스포츠 한국을 구현하기 위해 창간된 스포츠서울이니 만큼 두뇌스포츠인 바둑은 매우 중요한 육성대상…”이라는 말씀이 엿보이는데, 요즘의 바둑 스포츠화 방향에 대해서 이미 큰 테두리 속의 추측을 한 것일까.
토너먼트 첫날인 6월 14일, 나도 하얀 와이샤츠를 입고 출전했다. 반팔 접은 내 모습이 당시의 사진에 남아있다. 머리는 길었다. 여름인데도 거의 귀를 덮을 만큼 길었다. 무슨 까닭으로 저리도 긴 머리를 고수했을까. 하하. 유행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탈락했는데, 그래도 85년은 단 하나만으로도 유쾌했다. KBS 바둑왕전 본선 토너먼트에서 조훈현을 만나 한 판 배울 수 있었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바둑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서도 당하고 저기서도 당했을 것이다. 중반 무렵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충격 속에서 못내 부끄러워 했으니까. 남에게 보이는 대국은 그 부끄러움이 다른 것.
그 후 1994년까지 나는 조훈현과 6국을 두어보았는데, 그것에 나는 크게 만족했다. 내가 프로가 아니었다면 어찌 6국이라도 배워볼 수 있으랴. 물론 전패였다. 하하.
내가 프로가 아니었다면 어찌 조 국수에게 한 판이라도 백을 잡아볼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3국은 내가 백을 잡아봤으니, 그 아니 유쾌하랴.
그러나 언제나 유쾌할 수는 없는 법.
학교 생활과 기사 생활과의 양립에 대해서 나는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난 번 일기에 비록 적당히 했다고 썼지만 그건 초기의 일.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공부와 바둑과의 양립에 대한 과거의 경험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고등학교 때의 바둑과 학업. 함께 하기 어려운 그 작업.
2학기가 되자 나는 3개의 과목을 신청했다.
비교정치론
정당론
국제정치론
공짜는 없었기에 적당히 한다는 것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갖추어가는 세계와 내가 아는 세계와의 격차가 눈에 뜨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론들에 대한 이해의 폭에서 알 수 있었다. 대화를 해보면, 그리고 시험을 볼 때 준비해서 서로가 주고 받는 note를 보면 내 지식과 타인의 그것과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성적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수준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논문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일정 수준에 오르면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의 첫 마디만 봐도, 대화 몇 마디만 해봐도, 알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고 말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법.
지식이란 쌓여야 다른 지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학문이란, 대부분의(아마도 모든) 전문분야와 마찬가지로 - 바둑도 다르지 않다 - 하나의 가상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의식을 집어넣는 것.
머릿속에 하나의 세계를 쌓아두면 곧 다른 세계와 충돌이 되는 것.
물론 서로 충돌되지 않는 세계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나에게 있어서는 심리학과 정치학, 인류학, 등등 ….
비교정치학 강의 시간에 S. Freud의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설서로써 H. Marcuse의 eros and civilization을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심리학의 지식에 크게 도움 받았다.
그 이전 대학 때부터 심리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는데 - S. Freud의 psychoanalysis라는 세계 속에서 한 동안 헤맨 적도 있었다 - 그것이 거대 이론 grand theory과 과학 철학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로 기초 과학의 힘을 새삼스레 느낀 첫 경험이었다.
그러나 바둑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 사회과학과는 충돌되는 세계였다. 적어도 정치학하고는 별로 맞지 않았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야겠다.
바둑에의 전념과 학문에의 전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전념! 그 단어!
강의 시간에 느끼기도 했다. 교수가 나를 적당히 하는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왜 아니 그러겠는가.
다만 석사 과정이기에 그리 이해되어도 무방했다.
아마도 석사 과정이기에 교수도 그리 넘겼을 것이다. 그런 점이 다소라도 있었다면.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그 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모른 척하는 단계는 분명 아니었다.
밤 9시 27분.
가만, 그러나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거 아닐까.
학문과 바둑. 그에 대해서.
가만, 역시 너무나 단순한 태도 아닐까.
전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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