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바둑 도형만을 살피면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일단 덮어 두었다.
다음날 정오가 이른 시각, 육도선생은 그가 근무한 역사문제연구소의 장서실(藏書室)을 찾아갔다.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에서 거둬들인 수많은 책들은 진열장의 나무 책장 안에 촘촘히 버티고 있었다.

특별한 용도의 책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거의 조선의 역사를 왜곡시키려는 의도의 책들과 일본의 천황가를 이루게 된 해괴한 내용들이 자리잡은 채였다. 종류도 그러했지만 양이 워낙 많아 진열된 책들은 3층까지 빽빽이 차지한 상태였다. 안내를 맡은 처녀가 물었다.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

육도 선생이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은 내 친구와 내기가 벌어져 이곳에 왔소이다. 자신이 책 속에 숨겨놓은 비밀을 찾아낸다면 좋은 선물을 준다고 하질 않겠소. 그래서 와 본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만 둬야할 것 같습니다.”

“왜요?”

“글쎄, 왜 그런 내용을 내게 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자 아가씨도 보십시오.”

육도 선생은 다른 종이에 베껴온 쓰노다 신이찌(角田新一)가 남긴 내용의 요점만을 보여주었다.

<벼에는 탄수화물이 70~85%, 단백질이 6.5~8.0%, 지방은 1.0~2.0%이다>

그 아가씨는 잠시 들여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보니 죽음을 당한 쓰노다 선생이 생각나네요. 그 분은 가끔 우리에게 글자 퍼즐을 만들어 수수께끼를 냈거든요. 만약 그 분이라면 숫자들을 모두 합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우리 조선인들은 궁합 같은 걸 보잖아요. 남녀가 혼인할 때 그것을 보며 서로 살(煞)이 끼었는가를 살펴 혼처를 정하잖아요. 그치만 이게 웃기는 거랍니다. 언젠가 쓰노다 선생이 그런 말을 해주었어요.”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궁합(宮合)’의 시작은 한(漢)나라 왕실이 흉노에게 화평을 제안하며 공주를 시집보낼 때 쓰는 방책의 하나였다. 흉노들이 원하는 공주를 보내지 않기 위해 만든 것으로, 어떻게 하든 맞지 않게 조립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훗날 조선과 일본에 전해져 혼사를 치를 때 기본적으로 맞춰보는 애물단지가 됐지만 궁합은 근본적으로 맞지 않게 조립된 장난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주(四柱)라는 것은 어떤가? 이것 역시 점치는 자들이 심심파적으로 운행한다는 것이지만, 쓰노다는 그것만큼은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안내를 맡은 아가씨가 덧붙였다.

“우리가 사주를 보듯 서양에는 ‘생명의 숫자’라는 게 있답니다. 쓰노다 선생은 그걸 ‘행운의 숫자’라고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1935년 5월 17일에 태어났다면 이 분이 태어날 때 지닌 생명의 숫자는, 1＋9＋3＋5＋5＋1＋7=31이죠. 여기에서 다시 숫자를 쪼개면 3＋1=4가 됩니다. 생명의 숫자는 ‘4’인 셈이죠.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안내를 맡은 아가씨는 그 말만을 남기고 다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게 일리 있다고 생각한 탓인지 먼저 벼에 들어 있는 성분에 대한 측정을 보았다.

벼에 탄수화물이 70~85%라면, 70+85가 되어 합계는 175이다. 이것은 1+7+5이 되어 13이다.
다음으로 단백질은 6.5~8.0%니 6.5+8.0이 되어 합계는 14.5였다.
그리고 지방은 1.0~2.0%므로 1.0+2.0이 되어 합계는 3.0이다.
그러므로 벼에 들어있는 성분들의 수는 ‘175, 14.5, 3.0’이다. 선생은 일단 그것들을 한쪽에 기록하고 바둑 도형을 생각해 보았다.

이곳 역사문제연구소는 책을 정열하는 방법을 쓰노다가 계획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일본의 석학이며 차세대 역사연구의 주역이라고 격찬할 만큼의 수재였는데, 아깝게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벼에 대한 성분은 풀렸다고 보고, 문제는 바둑 도형이었다.
<제1기 본인방 습명윤허서>를 복사한 게 누군가에게 전해야 할 내용에 대해 관심을 끌기 위함이었다면 거기에도 무언가 쓰노다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단초가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열람실을 돌아다니자 조금 전에 안내를 맡은 아가씨가 다가왔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최근에 내부를 약간 고쳤어요. 예전엔 책장 하나에 에이(A)에서 제트(Z)까지 표기했는데 며칠 전부터 일본어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로 바뀌었거든요. 물론 그 다음엔 가기구게고(かきくけこ)구요. 세로측 배열은 1부터 20까지니 그건 변화가 없었죠.”

그 말을 듣자 육도 선생은 즉시 앞줄로 달려갔다. 쓰노다가 남긴 묘수풀이 도형의 풀이도가 A-17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로측 배열 A의 열일곱 번째 칸을 찾아가 탄수화물에 해당하는 175번에 꽂힌 책을 펼쳐들었다.

그 책의 13페이지를 펼쳤을 때 아무 것도 인쇄 되지 않은 공란엔 붉은 싸인펜으로 <전비(前扉)>라 쓰여 있었다. 책을 제본할 때 쓰는 ‘앞 도비라’라는 뜻이었다. 육도선생은 겉표지 안쪽을 조심스럽게 뜯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