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팍스코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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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팍스코리아나!

2005-10-17 프린트｜스크랩

10월 17일 아침 7시 12분. 창을 여니 조금은 차가운, 그러나 결코 싫지 않은 아침우유의 맛을 담은 바람이 밀려듭니다. 제10회 LG배 세계기왕전 8강전 한국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곳은 베이징(北京) 공항에서 3, 40분쯤 걸리는 교외 순이 향촌골프빌라. 언젠가 은퇴 후 한적한 곳에 정착해 글을 쓰며 유유자적 살고 싶다는 소망에 딱 들어맞는 전원 가옥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천공항을 출발해 베이징에 도착한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섰네요. 10월 9일 농심 신라면배 참관차 베이징에 왔다가 본선 제1~4국을 관전하고 15일 오후 3시 베이징공항에서 LG배 선수단과 합류하여 이곳으로 넘어왔습니다. 신라면배 본선 첫 대국에선 목진석,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의 뒤를 이어줄 샛별로 기대했던 강동윤 4단이 예상외의 출전자 하네 나오키 9단에게 패했죠.

6년 연속 우승을 자랑하는 한국의 선봉장이 3년 연속 첫 대국에서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느낀 것은 ‘의욕과잉’입니다. 강동윤 4단은 신라면배를 통해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위 선배들의 데뷔 당시와 비교할 때 결코 약하다고 말할 수 없는 강자입니다. 선발전에서 이세돌 9단과 송태곤 7단을 꺾었으니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졌느냐.

흔한 말로 백지 한 장 차이도 되지 않는 정상급 강자들의 승부는 대국당일 컨디션이나 심리상태 등 실력 이외의 변수로 명암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기자는 강 4단도 그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있는 동안만 이기고 싶다(4연승을 거두고 싶다는 뜻)’는 의욕적인 인터뷰를 가진 뒤 첫 대국에서 패하는 바람에 피 끓는 팬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지만, 한번쯤 가만히 생각해볼까요. 물론, 하네 9단이 강 4단을 꺾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본의 에이스라는 사실은 논외입니다.

16세의 소년이 선발전에서 이세돌 9단과 송태곤 7단을 꺾었습니다. 이세돌 9단이 누굽니까? ‘세계가 뒤를 좇는 이창호’의 아성에 최초의 위기를 심어준, 월드스타입니다. 송태곤 7단도 그렇습니다. 최근 슬럼프현상을 보이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최강 한국바둑의 5천왕으로 꼽아주던 강자입니다. 비록 나이 어린 소년이지만 그런 실력파들을 꺾고 세계무대로 나선 승부사에게 그 정도의 패기와 배짱도 없다면 그게 오히려 김 빠지는 일 아닐까요.

뭐,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런 자신감과 팬들의 기대가 의욕과잉의 동인(動因)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승부에 임하기 직전 프로들의 심리상태는 기자들이 옮기는 몇 줄의 기사내용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승부에 대한 자신감, 의욕, 긴장의 작용도 각 개인의 성격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똑 같은 긴장감이라도 어느 사람에게는 집중력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를 보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정반대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한국의 두 번째 기사로 출전한 류재형 7단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대국 직전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북한식당 ‘해당화’에 마련한 식사자리에서 선수단장 조훈현 9단으로부터 ‘아무래도 류재형 7단이 조한승 8단보다 좀 약하니까 먼저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문득, 제갈공명이 ‘장비는 안되니까 관우(혹은 조자룡?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돼 기억이 어슴푸레하네요)를 불러오라’는 말로써 장비를 자극하여 적장을 물리치는 삼국지의 한 대목이 스칩니다.

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약빨’이 먹히긴 했던 모양입니다. 류재형 7단이 3연승을 노리던 하네 9단을 제압한 뒤 ‘약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꼭 이기고 싶었다’는 소감을 밝힌 것을 보면 그 말이 오기와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순기능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합니다. 비록, 하네 9단을 꺾어 아우의 패배를 만회한 류 7단이 연승으로 베이징대회의 대미를 장식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이제 7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떼었으니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신라면배 베이징대회 기간중 기자의 뇌리에 가장 큰 인상을 남겨준 것은 젊은 프로들의 끈끈한 동료애입니다. 중국리그에서 활약중인 김승준 9단, 목진석 9단, 홍민표 4단이 짬이 날 때마다 들러서 응원을 해주었죠. 김승준 9단은 해외출정에 서툰 원성진 6단을 공항까지 전송해주었고 목진석 9단은 16일의 일본원정 때문에 선수단과 떨어져 호텔에 남아있던 조한승 8단과 강동윤 4단의 보호자(?)를 자임했습니다. 물론, 홍 4단도 빠질 순 없겠죠? 홍 4단의 역할은 LG배 8강에 진출한 이세돌 9단과 박정상 6단의 응원 도우미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조남철 선생께서 ‘바둑판을 짊어지고 대중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이땅에 현대바둑을 보급한 이후 60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변두리취급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89년 조훈현 9단의 잉씨배 제패 이후 16년간 단 한 해도 세계최고의 자리를 잃지 않은 자랑스러운, 적어도 바둑에 관한한 ‘팍스코리아나’입니다.

신라면배 베이징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아침, 체크아웃을 위해 프로들 중 가장 먼저 호텔 로비로 내려온 조훈현 9단과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9시 30분 출발인데 젊은 기사들은 10분 전까지 객실에서 내려오지 않았죠. 한국기원 전재현 과장이던가요? ‘프로들은 하도 초읽기에 단련이 돼서 그런지 시간을 칼 같이 맞춰 나타난다’고 말하더군요. 그때 나눈 이야깁니다.

기자 “젊은 친구들한테 속력행마 좀 전수하시지 그러셨어요?”
조 9단 “요즘 애들 말을 안 들어. 아, 창호 때부터 안 듣더라니깐∙∙∙”

일행 모두 박장대소했지만 기자는 내심 숙연했습니다. 조 9단의 이 한 마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훈현의 시대는 갔다. 지금은, 두텁고 느린 반면운영으로 천하의 조훈현을 뛰어넘은 이창호의 시대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보는 조훈현은 여전히 강하고 자유롭습니다. 한국바둑의 빛나는 영화, 바둑의 팍스코리아나를 이끌고 있는 이창호와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또 그 뒤로 끊임없이 이어질 세계주도의 힘찬 물살은 조훈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로 올라서는 조 9단의 은빛 머리카락은 참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웠습니다.

농심 신라면배 선수단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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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법문

｜ 2005-10-17 오후 3:36: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