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바둑을 말하면 우리는 흔히 사안가(四安家)와 덕천(德川) 막부의 후원을 들곤 한다. 일본역사에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강호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덕천막부의 후원 속에 일본바둑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도쿠가와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없는 일본바둑은 없다는 입장(?)이다.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생존시에 감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의 까마득한 상하 관계였다. 바둑의 기력만을 따져도 아홉 점 치수(?)의 인물이었다. 사실 이에야스는 40대 후반에 겨우 바둑의 묘미를 알고 즐기던 정도였다.

본인방 산사(算砂)라는 바둑 고수를 발탁하고 그들에게 명인(名人) 칭호를 주고 약간의 녹봉을 지급한 사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멈출 수 없는 전쟁 욕구를 동아시아로 전개하는 문록(文綠)의 역(力)을 일으킨다. 조선에서 말하는 임진왜란이 그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전대미문의 대전쟁을 일으켜 놓고 바둑을 운운하며 희희낙락이다. 조선실록에 바둑 마니아 히데요시의 발언이 있다.

신은 원약(遠弱)하고 궁벽한 왜국(倭國)에 살면서 성지(城池)가 6척도 안 되고 봉강(封彊)이 천 리가 되지 않지만 항상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본디 지족하는 사람은 언제나 지족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중국의 임금으로 만승(萬乘)의 천자가 되었으니, 지극히 존귀한데도 항상 부족한 마음을 품고 멸절(滅絶)의 뜻을 행하여 군대를 다 이끌고 와서 신의 경계를 침범하였습니다. 그러나 물과 육지 그리고 강과 바다가 많은 고장에서는 자연 방비가 있을 것이니 어찌 길가에 앉아 항서를 쓰겠습니까? 예부터 군대는 항상 승전함이 없었고 장군은 항상 패전함이 없었습니다. 신이 문(文)을 말한다면 공맹(孔孟)의 문장(文章)을 가졌고 무(武)를 말한다면 손자와 오자에 비교할까요? 사람이 이미 자애(慈愛)하지 않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불효(不孝)하는 것입니다. 난가산(賀蘭山)에서 만나 바둑 한 판 둘까 하는데 신이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 선조실록.

난가산(하란산의 다른 표현)에서 만나 바둑 한판 두자는 히데요시의 발언은 엉뚱하면서도 호탕(?)하다. 세상의 중심이자 천자국을 자청하던 중국을 상대로 저런 발언을 한 사례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히데요시는 만력제를 상대로 조금도 위축됨 없이 할말을 한다. 조선실록의 이 기록은 재미있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일급 기밀문서가 중간에서 새어나와 조선 조정에 노출되어 있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문록의 역' '만력의 변' 등으로 이름 지어지며 동양삼국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치열한 전쟁의 한 단면으로 이해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만력제, 그리고 선조임금 이들 세 사람은 삼국전쟁의 선봉이자 최종 작전권자였다. 신기한 점은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바둑의 마니아란 점이다. 히데요시는 말할 것 없고 만력제는 환관 '주력신'이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을 듣고 그와 2박3일 바둑을 두다가 신하들의 결재 야습(?)을 받은 에피소드를 남길 정도였다. 선조는 조선 군왕 28명 중 세조 다음으로 바둑을 좋아한 군왕(본 칼럼난 조선사바둑전 참고)으로 부언이 필요치 않다. 다만 전쟁의 중단을 거부하는 선조에게 명나라 장수 진유격이 한 발언이  떠오른다.

- 바둑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실력을 키워 다시 한판을 청하면 된다.

진유격의 말에 선조는 수긍을 한다. 그리고 동아시의 삼국전쟁은 끝이 난다. 히데요시와 선조의 바둑담은 수없이 많다. 상대적으로 바둑담이 적은 만력제는 만주군벌 이성량과 호부상서 '진호'에게 바둑판을 선물한 적도 있고 그 유물도 남아있다.

지나간 시간은 아름답다. 그 시간 속에 꼼꼼하게 박힌 추억은 아스라하기 마련이다. 유년의 꿈, 따뜻하던 어머니의 손길, 첫사랑의 기억 등은 더욱 그렇다. 난가산은 도교의 분위기가 깃든 신화의 산이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산이다. 그렇지만 바둑인들에게는 꿈과 추억의 산이다.

난가(爛柯)산.

우리는 언제 그 난가산에 들어 바둑 한판을 청할까.
(爛柯 吾輩何時節 入爛柯 請對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