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는 문화이벤트가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개최되었다. 그 이벤트에 일본의 바둑인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의 아들인 기타니 마사미치(木谷正道)가 아버지를 기려 마련한 바둑테마는 한일 바둑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통신사와 바둑이 엮인 이벤트의 이유가 선명하지 못하고 일본 적광사에 있는 이약사의 글씨 등을 피력하며 불분명한 바둑담으로 두루뭉실 넘어가는 모습은 아쉽다.

적어도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을 표방하고 만들어진 이벤트라면 역사적 팩트가 중요하고 그 팩트에 기초할 때 문화적 가치와 힘을 갖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일일 터이다. 과연 조선통신사와 바둑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정색을 하고 연구한 논문은 한일간에 나온 적이 없다. 간혹 대중적인 글쓰기를 하는 학자들과 재야의 연구가들이 부정확한 자료를 들어 야담식으로 전개해 온 실정이었다.


조선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다. 그 점은 일본도 매한가지다. 임광 등 수많은 조선 통신사절단의 발행 과정을 보면 당대의 사람들이 기록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통신사는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 에도를 다녀오는 데 보통 8개월이 걸린다. 임광이 이끈 사신단의  발행관은 인조였고 발접관은 일본의 쇼군 도꾸가와 이에미스였다. 이때 주고 받은 양국 간의 외교문서를 한번 보자.


인조 : 작년에 귀국에서 멀리 바다를 건너 수빙을 하시니 좋은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나이까. 마침 모문룡(명의 장수 조선당에 들어와 있었음)이 우리 국경내에 있어 경황이 없다가 대마도 번주의 보고를 받고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어지신 왕이 일본의 인후를 보중하신다기에 변변치 않은 물목으로 성의를 갖추어 폐백을 하니 혜량하시고 서로 간의 은의를 돈독히 하고 경사가 이어지기를 비옵니다.

이에미쓰 : 일본국왕 이에미쓰가 조선 국왕전하께 답서를 올립니다. 섣달의 차가운 날씨가 사람을 핍박하는데 한 통의 서신과 세 사람의(통신3사) 따뜻한 방문을 받고 벌써 봄바람이 당도한 줄 알았나이다. 기쁩니다. 과인이 일역(일본)을 통일하게 되어 그걸 귀국이 알고 이리 예절을 세워 진귀한 토산물과 여러 물목을 보내주어 감사합니다. 서로의 선린을 계승하여 경사가 만대에 이를기를 확약합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


통신사는 460명이나 되었다. 정사(정3품) 부사(정4품) 종사관(정5품)에 불과한 통신 3사가 이끌고 가는 수행원이 460명이나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 막부는 이들 3사를 조선 국왕의 행차나 되는 듯 열도 전체에서 대대적인 환영과 영접을 한다. 사신단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통신 3사. 역관 3명. 서기 3명. 화원 3명. 의원 1명. 자제군관 5명. 군관 12명. 마상대 2명. 기함장 2명. 열수(요리사) 1명. 하감장 3명. 노비 49명. 소동(급사)15명. 훈도 3명. 소통사 15명. 예단직 2명. 기수 악대 20명. 포수 6명. 사령 16명. 사공 24명...

통신사는 문 무 예 세 분야에 걸쳐 각종 전문인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이 속에 전문 바둑인이 끼어들 소지가 충분하다. 나는 이 점을 착안, 백방으로 바둑의 고수를 추적해 보았으나 자료가 없었다. 겨우 인조때 홍세태(1653ㅡ1725)가 시문과 바둑 등 각종 기예에 능해 일본에서 활약이 탁발했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박지원의 기록이 하나 있다.

삼사를 수행한 사람들은 모두가 뛰어나다. 뛰어난 문장과 박식은 물론 천문 산수 점술 각종 악기 바둑 활쏘기 등 나라안의 으뜸인 자들만 뽑았다(博奕驥射以一藝各國者審從行而).


박지원은 이언진을 기록한 우상전에서 위와 같이 발언한다. 조선통신사를 구성할 때 바둑의 고수를 가려 배치했다는 증거다. 박지원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통신사 참가자들을 살펴보면 바둑과 관련된 인물이 의외로 많다. 조선바둑의 고수군인 덕원령을 기록으로 남긴 홍세태가 대표적이다. 이언진 홍세태 등은 모두 바둑을 잘 이해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통신사의 보고서인 각종 일본방문기에 바둑을 둔 기록이나 일본인들의 바둑두는 모습을 기록한 자료도 발견된다.

우리측 자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메노리호슈(雨林芳州)의 귤창다화(橘窓茶畵)에는 '일본 조선 중국인은 바둑판 위에서 언어가 필요없다' 했다. 1711년과 1719년 두 차례나 조선통신사를 접견한 일본 유학자이자 역관이었던 아메리노호슈는 조선인 역관 현덕윤(玄德潤)과 아름다운 교분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아메노리호슈는 조선인 고수와 지역 번주들의 바둑을 기록한다. 이때 일본인 화가 한 사람은 바둑두는 조선인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오늘날까지 전하기도 한다.

일본 적광사에 있는 조선통신사 일행 '이약사'가 썼다는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