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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 KT 사장의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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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 KT 사장의 바둑
형제간을 묶어준 바둑
어릴 적 우리집에는 유난히 두껍고 거의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반들반들 때가 찌든 바둑판이 있었다. 언젠가 들은 얘기로는 바둑을 좋아하시는 외삼촌이 6·25때 누이집(어머니)에 맡기고 간 것이라고 한다. 방 한 구석에 있던 바둑판이 어찌나 무거운지 옮길 엄두를 못 내고 할 수 없이 그 위에서 튕겨먹기나 오목을 둘라치면 누나랑 둘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편하게 돌을 놓곤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형제가 많았다. 사내들이 많다보니 승부욕도 대단해서 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처음 바둑급수는 위에서 아랫순으로 점호하는 식이었다. 아버님이 약 5급, 큰형이 6급, 이런 식으로 해서 바로 위의 다섯째 형은 10급, 내가 13급 정도였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수업시간에 앞에 앉은 친구와 가로 세로 줄이 그어져 있는 방안지를 돌려가며 바둑을 두었는데, 선생님께 들켜 야단을 무던히 맞으면서도 그 짓을 계속했었다. 그 덕분인지 점차 바둑실력이 향상 되어 바로 윗형을 이기기 시작했는데 형에게 늘 이기면서도 백을 뺏는데는 무려 6개월이나 걸렸다. 세상에 먼저 태어난 자의 횡포라고나 할까. 단지 형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때는 형이 백을 들고 먼저 놓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 그러던 중에 바둑 서열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잘 두면서부터 바로 윗형이 2등으로 바뀌고 그 위의 형이 3등…, 역순이 되면서 큰형 바둑이 제일 약해져 버린 것이다. 마침내 우리 집안에도 세대교체의 바람이 닥쳤다고나 할까.
형제들이 모이면 주로 둘씩 편을 먹고 두는 연기(連棋)를 자주 두었는데, 큰형과 내가 한편을 먹고 중간의 형들 둘이 한편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때 큰형은 아주 중요한 시점이 되면 갑자기 팻감을 쓰듯 응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에 두어 나에게 차례를 넘기는 묘수를 발휘하여 우리팀이 내기에서는 줄곧 이기곤 했었다.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패와 축
'패는 요술쟁이'라는 말도 있지만, 바둑을 처음 배울 때는 패가 무척 신기했었다. 그때는 팻감을 쓰면 상대방도 꼭 응수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 아무데나 두고 "패를 썼으니 받으라"고 강요 하기도 했고, 또 큰형은 가끔 팻감을 쓰지도 않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그냥 다시 따도 된다"며 어거지를 쓰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신기한 것은 '축(逐)'이었다. 축을 잘못 보고 약 20여 수를 두다가 비로소 축이 안되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그 20수를 모두 무르자고 떼를 쓰기도 하면서 서로 승강이가 벌어지곤 했었다. 바둑은 다른 종목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머리싸움'이란 인식이 강해서 아무리 형제간이라 해도 자존심이 많이 작용했던
것이다. 특히 동생에게 지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 형들은 한번 지면 이길때까지 '한판 더!'를 외쳐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승강이가 벌어질 때마다 입밖으로는 "다시는 상대하나 봐라"를 되뇌었지만 하루만 지나면 또 언제 그런 일이 있어더냐 싶게 키득키득거리면서 바둑판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렇듯 바둑은 나에게는 형제들을 가깝게 묶어주는 좋은 친구였고, 또 어린 마음에도 끝까지 머리를 쥐어짜서 좋은 수를 내보려고 하는 끈질긴 정신력도 키워 주었다. 요즘은 이창호라는 바둑천재를 보고 많은 어린이들이 바둑을 공부하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이창호 九단이 바둑 아닌 다른 것을 했다면 과연 세계의,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바둑 예찬론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바둑만큼 공정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나 싶다. 나이도 권력도 부도 모두가 허망하고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실력보다는 처세술과 배경 등으로 출세하려는 경향이 짙다. 바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공정한 승부이다. 나는 그러한 깨끗함이 좋다.
또한 바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완벽한 게임이다. 컴퓨터에도 져버리는 서양의 장기인 체스와는 비교도 안되며, 신의 경지까지 도달해도 풀리지 않는 바둑의 복잡성과 신비가 또한 마음에 든다.
어느덧 아흔이 넘으신 아버님은 요즘 PC통신을 통해 바둑을 두시곤 한다. 어릴 적 그때의 절은 바둑판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어릴 때의 그 순수함과 어우러진 정겨운 추억들은 나를 매료시켜 지금도 머리 허연 형들과 모처럼 모이면 바둑판 앞에 앉게 한다.
[이상철 KT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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