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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곽창훈 - 바둑이좋아 내가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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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좋아? 바둑이 더 좋아?
내 직업이 의사여서 그런지 아직도 잊지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의과대학 시절인 70년대에 월간「바둑」지에서 읽은 실화인데, 한 산부인과 의사가 산모 남편으로부터 호되게 따귀를 맞았다는 이야기.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이 산부인과 의사는 진료 틈틈이 시간만 나면 바둑판을 벌리는 지독한 바둑광이었는데 하루는 예의 그 '샌드위치 대국'중에 응급환자가 들이닥쳤다. 간호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바로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급한 환자임을 알렸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인데도
- 이 의사, "응, 그래? 1분이면 끝나…. 곧장 갈게."
- 그래놓고 바둑삼매경에 빠져 엉덩이 뗄 생각을 않는 것이 아닌가. 간호원이 재차 달려왔건만 이번에도
- "곧 가마"란 건성대답뿐이고….
그리기를 한두 차례, 돌연 바둑판이 왈칵 뒤집어지더니 눈에 불이 번쩍 튀는게 아닌가. 정신을 수습하고 앞을 쳐다보니 한 젊은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곧 죽일 듯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씩씩대고 있었다. 산모의 남편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이 의사, 진료실로 다리가 안 보이도록 달려갔고, 다행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후일담이 더 재미있다. 몇 년이 지나 이 바둑광 의사가 어느 기원에서 바둑상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낯선 이가 슬며시 다가와 맞은 편에 앉더니"000선생님이죠?"하며 매우 반가운 체하더란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때 귀싸대기를 올려붙인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그 사건 이후 도대체 바둑이란게 얼마나 재미있기에 환자가 죽어 나자빠져도 정신을 붙드는 것인가 하여 자기도 바둑을 배웠꼬 지금은 선생님과 같이 광이 되었노라고 지난 세월을 털어놓는 대목에서 둘은 급기야 너털웃음을 터드렸다. 마침 기력도 동수여서 이후 오래도록 바둑벗이 되었다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
어머니와의 숨바꼭질
바둑 두는 이 치고 된통 미쳐보지 않은 이 어디 있을까만, 나 역시 그랬다. 초등학교 때 과외학원에서 오목을 배운 걸음에 바둑을 설알게 되었고 중3∼고1때는 광화문 근처 기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1년 남짓만에 18급에서 3급까지 올라갔으니 그 열정이 얼마였던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이때는 독과외를 할 때였는데 과외 선생한테는 가지 않고 기원으로 게걸음질치는 때가 많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한번은 어머니께서 빗자루를 들고 기원 문 밖에까지 찾아와 당장 나오라고 소리치시는 것이 아닌가. 광화문 일대를 깡그리 뒤지고 다니신 것이었다. 엎질러진 물이라도 주워 담는 시늉이라도 해야 덜 얻어맞는 것인데 그만 다음 내 대답이 어머니 부아를 한껏 돋우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지금 어른하고 대국 중이므로 예의를 아는 동방예의지국의 학생으로서 도중에 일어설 수 없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께서 병원에 바둑판도 못 갖다놓게 하신다. 환자에 성심성의를 기울여야할 의사가 잡기에 몰두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다. 몰론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면서도 한편으론 몇 점 먼저 떼어주고 후절수로 사는 바둑의 이치를 모르시는 처사인 것 같아 여간 섭섭한게 아니다. 마침 우리 딸아이가 조훈현 九단의 둘째딸인 승희와 상명여중 같은 반 짝궁이어서 안사람들끼리는 학부형 모임에서 종종 만나 교유하는 모양이다. 나도 한때는 조훈현 九단 같이 장미를 피우면 한 급수라도 늘까 하여 장미담배를 끽연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조九단이 금연한 후로 성적을 내는 것을 보고 2년전 딱 끊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한번은 집사람(홍경희)이 "어머님, 아범 바둑 두는 것 너무 나무라지 마셔요. 담배 끊은 것도 순전히 바둑덕이라고요."라며 '부창부수(夫唱婦隨)격' 지원사격을 했고 이에 어머니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그래?"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후한 점수는 땄다.
이왕 집사람 얘기가 나왔으니 '팔불출'소리를 듣더라도 한번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집사람도 같은 의사(대방동 성애병원 산부인과)인데 가끔 바둑판을 끼고 있는 내게 "돌이 더 좋아, 내가 더 좋아?"하는 유치한(?) 질문을 해댄다.
집사람의 잘못된 처사에 대해 나는 바둑적인 표현을 써서 "한수 앞도 못 본다"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집사람이 가장 수모적인 발언으로 여기는 표현이기도 한다.
그때마다 집사람은 그래 봤짜 학벌은 경기여고를 나온 자기가 더 좋다며 은근히 중고등학교 시절 바둑 때문에 한때 공부를 등한시한 내 아킬레스건을 건들며 반격을 가한다. '깨갱'할 수밖에.
그렇지만 지금가지 서능욱 九단의 「손오공 접바둑 코너」에 집사람이 손수 응원 나온 인사는 단 한 분도 없는 걸로 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단한 '서포터'를 가진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내가 대국을 하는 동안 집사람은 서능욱 九단의 로드 매니저를 겸하고 있는 부인 현인숙 여사와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옆방 기사실에서 커피를 한 잔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 방의 손잡이가 고장나는 바람에 30분이나 갇히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바깥에선 망치로 문의 손잡이를 부수고 난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九단과 나는 태연히 바둑을 마치고 복기까지 했다. 실은 내다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는데 체면상 그럴 수 없었다. 서九단이 워낙 프로다운 부동심(?)을 보이셨던 영향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아, 그러나 바둑판에서의 천금같은 부동심이란 바둑판밖 부부관계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모래알 같은 것이더냐. 천신만고 끝에 '쇼생크의 탈출'에 성공한 두 사모님의 대갈일성,
"당신은 내가 더 좋아, 바둑이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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