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궁의 대처분 요구에 영조는 사도를 불러 뒤주에 가둔다. 뒤주에 갇히기 전의 마지막 모습을 홍씨는 놓치지 않고 있다.

-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으니 이제부터 하시라는 대로 허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흐소서.

아버님...(한중록)

사도는 이렇게 28세의 명을 접는다. 홍씨는 사도와 동갑으로 10세에 혼인을 하여 18년간 가시버시의 인연을 맺다가 이런 비참한 남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사도의 죽음은 조선왕조사에 유례가 없는 특이한 케이스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고 그의 아들 정조가 대를 이은 탓에 숱한 일화와 역사적 담론의 근원지가 되기도 한다.

한중록은 홍씨 자신이 환갑을 맞아 쓴 기록물이다. 한중록은 총 4권으로 되어 있다. 1권은 환갑 때 쓴 것이고 2,3,4권은 순조5년에 완성된다. 한중록은 홍씨가 아들 정조와 손자 순조에게 항의와 하소연을 하기 위한 홍씨 자신의 리포터다. 한중록은 사도의 억울함을 호소키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죽음을 자신의 집안인 홍문과 연관된 것으로 오해(?)를 하는 정조를 설득시키기 위한 내용이다.

홍씨는 정조가 화완옹주와 홍국영의 이간으로 홍문을 오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도의 죽음과 연관되어 몰락한 홍문(홍봉한, 홍인한, 홍낙인 등의 죽음)의 신원을 요청하고 정조가 이를 들어주지 않고 죽자 손자에게 재신원을 요청하는 작품이다.

화완옹주는 사도에게 여러번 얻어맞고 목에 칼까지 겨눈 협박을 당하며 사도와 척을 진다. 화완은 유별나게 딸을 사랑한 영조의 총애로 궁안에서 살며 어린 세손을 아들처럼(?) 대한다. 화완은 홍씨가 아들을 빼앗겼다 할 정도로 세손에게 과잉 사랑을 퍼붙는다. 이 점은 정조도 인정을 한 부분이다.

홍씨가 화완옹주를 증오한 것은 화완이 사도를 모함하고 세손을 모함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속에 사도가 화완을 구타한 대목은 여러 곳에 나온다.

- 신사년 미행 때 관서에서 기생 하나를 대동해 와 궁안에 두고 잔치를 열어 궁녀들과 뒤엉켜 잡되게 노니 만고에 이런 광경이 다시 있으리오. 2월에는 옹주를 불러와 실컷 때리고는 내가 병 때문이라 하며 사과를 하고 옹주가 서러워 공손치 않고 말을 하니 나는 듣지는 못했으나 죽기를 각오한 그 말이 얼마나 독했으리오.


홍국영은 홍씨가 화완 다음으로 미워한 인물이다. 홍씨는 홍국영을 요물이라 했다. 홍국영은 영조48년(1722년) 정시 문과에 합격해 세자 시강원으로 배치를 받아 오면서 정조와 첫 대면을 한다. 정조가 20세였고 홍국영은 24세였다. 홍국영은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과 10촌간이었고 정순왕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관주'와 4촌간이기도 하여 당대의 문벌인 홍문과 김문 양쪽과 다 친한 관계였다.

정조가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자신은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천명하는 기록은 보인다. 일득록이다.

- 나는 바둑 쌍륙 등 잡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성품 탓이다. 내가 학문이 소략하고 지리멸렬하지 않은 것은 이런 잡다한 것에 관심두지 않은 덕이다.

정조는 조선의 군왕들 중 거의 유일하게 바둑을 두지 않은 왕이다. 정조는 세손시절 공부를 다그치는 할아버지 영조의 경계를 뼛속에 담고 있던 사람이다. 영조는 51년(1775) 세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둑 장기 같은 하찮은 것도 배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다. 어린나이부터 글을 배우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항차 만기를 친람하는 국사를 배우는 데 게으름이 있어야 하는가.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잡기 등에 눈을 줄 여유가 없었다. 사방이 가시방석이던 탓이다. 그러나 정조가 바둑의 문외한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조는 조선의 군왕들 중 유일하게 바둑시를 남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홍제전서 춘저록에 정조의 바둑시가 있다.

碁.

하얀 댓자리 붉은 주렴에 해는 더디지네.
땅땅 바둑돌 놓는 소리 도끼자루 썩는 시간일세.
높은 누각에 손님 모시고 꽃그늘은 고요하고
만가지 일들도  한판 바둑에  달렸구나.

(銀簟紅簾午景遲/丁丁落子爛柯時/高樓留客花陰靜/ 萬事輸贏一局棊)

정조의 바둑시는 찰지고 튼실하다. 이시는 필자가 지면을 통해 세상에 처음 소개한 시이기도 하다. 과연 학군 정조의 문장이다. 정조가 일득록에서 자신은 바둑을 잘 두지 못한다 천명을 했으나 바둑을 주제로 이 정도의 피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조가 전혀 바둑을 이해 못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바둑을 두는 것은 피했으나 보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던 사람이 정조인 듯하다.

홍씨의 타도대상에는 정후겸도 있다.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양자로 한때 홍국영 못지않은 세도를 누리던 인물이다. 정후겸은 고동(高同)이라는 바둑고수를 지근에 두고 세손의 왕위계승권을 위협하던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홍국영 정후겸 등도 정조의 철권으로 모두 퇴출된다.

이 공간에 홍씨와 사도세자를 언급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역사적 평가를 하는것도 아니다. 홍씨는 사도, 정조, 홍국영, 정후겸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유는 홍씨가 언급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바둑을 이해하고 즐겼던 애기가들이란 것이다.

영정조시대 조선의 바둑은 엄청났다. '이덕무'는 어린이 바둑을 언급했고 '유본학'은 바둑을 모르면 가축 취급을 당한다는 당시대의 사회적 풍경을 전하기도 한다. 나라안에 향기(鄕碁) 도기(道碁)가 있다고 했다. 향기, 도기만 나타나도 그 사람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등에 발등을 포갤 정도라 한다. 나라안의 최고수를 선기(善碁)라 하는데 선기를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

일엽편주는 공연한 일엽편주가 아니다. 일엽편주도 바다라는 거대한 수원지가 있기에 떠다니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도 그런 것이다. 한 줄의 사료는 당시대의 담론이 생성되는 근거다. 많은 담론들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 간추려지고 간추려진 것이 한 줄의 사료인 경우가 많다.

홍씨가 사도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얼굴이 상했다는 기록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둑의 담론 안에서 이 기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작은 내가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된다. 기록의 결집도 그런 것이다. 이런 사소한 기록들이 하나씩 모여 담론이 되고 담론이 숙성 과정을 거쳐 문화가 되는 것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그 비운의 운명에 웃고 울던  그 사람들의 사랑의 플랫폼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