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대륙이란 미지의 세계를 말한다. 미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수반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신천지를 약속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사에 댓가 없는 것이 있던가. 하잘것 없는 애경사도 품앗이거늘 항차 세상을 바꾸는 개혁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여기 오늘을 안 살고 내일을 살고자 했던 한 집안의 내력을 적는다. 한 바둑 가문의 어둠의 가족사다.

 
      아름다운  꽃 그림자

      바둑판을 덮었는데

      한낮에 소나무 그늘 아래서

      바둑 한 판을 두었네

      계곡물 서늘한 용을

      내기 해서 얻으니

      해 지면 그 용 타고

      하늘로 가리라.

이 시는 고려, 조선 양조를 망라해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의 시다. 난설헌은 유선사 87수를 남긴 당대 조선을 뛰어넘어 한 중 일 동양3국에도 비견할 여류가 없었던 대(大)시객으로, 조선 선조조 정승이었던 허엽의 딸이다.

허엽은 슬하에 걸출한 자식들을 두었다. 일찍부터 출세가도를 달리며 문장을 떨치던 아들 허봉과, 난설헌 그리고 조선의 문장 허균이 그들로 허엽의 일가는 한마디로 당대의 문벌이었다. 난설헌은 오빠 허봉의 영향으로 시와 바둑을 배워 이미 어린 나이에 세상의 물리를 얻고  답답한 시대의 닫힌 사고를 고민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구를 시로 노래한다.

성리학의 답답하고 숨막히는 사조와 여성에 대한 차별에 갈등하던 난설헌은 술먹고 여자를 희롱하는 것을 풍류로 알던 남편을 애증하다 27세에 요절한다. 스승이자 바둑 사범이기도 했던 오빠 허봉이 38세로 죽은 3년 후였다.

난설헌의 오빠 허봉은 즐겨 바둑을 시로 남길 정도로 당대의 고수로 알려졌다. 그는 일찍 벼슬을 시작, 동인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다 필화에 연류되어 귀양을 살다 타향에서 객사를 했고, 정승이던 아버지 허목 또한 귀향지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 집안에 찾아든 유령의 저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이 시작이었다.

난설헌은 한이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것과 여자로 태어난 한이었다. 이것은 난설헌이 당시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품었던 열린 사고였다. 이 의식은 고스란히 동생 허균에게 내려가 사회 체제 전복이라는 급진 개혁을 꿈꾸게 만든다.

 
     귀양과 질책은 전생에 정해진 거고

     공명을 얻기는 이미 늦어도다.

     변방에서 밥먹고  바둑 두는 것 또한 즐거워라.

     게장맛 감칠 맛나고 아욱 맛도 일품이니

     우리의 삶 본디 제 입 위한 것

     처자식을 거두는 것이 전부는 아니로세.

허균의 이 시는 바둑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인생에 대한 철학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입신양면에 관심없는 관조의 삶이 세상살이의 가치를 자식들로부터도 끊어낸 실로 한 소식 깨달음이다. 허균은 당대의 문벌이라는 배경과 출세가도를 달리던 자신의 전적에서도 바로 이 깨달음으로 끝임없이 갈등하고 번민한다.

그의 갈등은 반상의 구별과 남녀의 차별 등 당시의 지식인들이 도저히 생각지 못한 대목이었다. 그것은 그의 누이 난설헌의 한과도 통해 있다. 허균은 공주 목사로 재직 중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실제로 공주 서쪽 20리에 있는 무성산에 홍길동성이 잔존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 개혁에 온 몸을 던진 그의 행동하는 양심이 비장하다.

허균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이조참의를 지내며 김우성 하의준 등과 모반을 도모하다 체포돼 광해군 10년(1618) 능지처사를 당해 각 몸둥이가 소에 끌려 8도로 보내지는 참화를 당한다. 실로 한 집안에 깃든 유령의 저주가 아닐 수 없다.

 
     바둑판 위에는 하늘의 기운이 서려 있고

     19로 분도는 세상의 이치로다.

     영웅들이 그 위에서 승부를 펼치니

     흑백간의 존망이 그곳에 있도다.

바둑가의 맏형격인 허봉의 이 시는 능히 3남매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하다. 그들 비범치 않은 3남매는 바로 바둑을 통해 인생의 허무와 출세간의 덧없음을 느꼈던 듯하다. 특히 막내 허균은 승부를 통해 단숨에 세상을 뒤엎을 야망을 키운 듯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허균의 일생은 도무지 설명이 안된다.

이조실록에 80여 회 등장하는 허균의 기록은 한마디로 무뢰한이다. 패륜아며 파천황이 따로 없다. 얼마나 사대부들이 그를 경계하고 질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이단으로 육시를 당해 죽었고 죽어서는 사문난적을 당했다. 그리고 400년 동안 저 어둡고 침침한 역사 속에 유배를 당했다.

유령의 저주는 이렇게 길고 지독했다. 누가 말했던가. 역사는 기다리는 자의 것이라고... 지금은 허균 3남매가 꿈꾸던 바로 그 시대다. 시련이 길고 아팠던 만큼 그들의 슬픈 일생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비운의 바둑가가 맞았던 역사는 너무 춥고 어두웠다.

바둑은 이리도 사연과 곡절이 많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저 역사의 현장 현장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바둑의 융성(?)이 어찌 이 역사의 현장을 외면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한과 꿈 속에 바둑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우리 바둑의 미래는 밝다. 바둑의 수레를 역사의 저력이 끌고 바둑인들의 열정이 밀어가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