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는 사랑을 아들에겐 의리를
가정의 달이자 부처님 오신 달이기도 하다. 이런 좋은 계절에 효(孝)와 법(法)에 통하는 '부모은중경'이 떠오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이 은중경이다. 원제목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으로 길다. 유교의《효경(孝經)》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된다.
경(經)은 부모의 은혜를 십대은(十大恩)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십대은은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주는 은혜(懷眈守護恩), 해산 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는 어머니 은혜(臨産受苦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는 은혜(究意憐愍恩) 등 열 가지다. 조선은 이 경전을 유교의 덕목과 부합한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편찬, 보급했다. 억불숭유 속에서도 부모의 은혜와 보답은 천음(天音)이기에 학풍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역사를 좋아한다. 특히 조선사 속에 오래도록 빠져 허우적댔다. 바둑의 역사도 좋아하여 무상으로 바둑의 그늘을 살폈다. 그중에서 가정의 달에 딱 맞는 한 인물을 소개한다. 그는 조선 말기를 살았던 홍만식(洪萬植 1842-1905)이다.
특진관(特進官) 조동윤(趙東潤)은 처음에 전 참판(前參判) 홍만식(洪萬植)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불행하게도 홍씨의 나이 겨우 열두 살에 병이 있어 이혼한다는 글을 성상께 아뢰고서 홍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고(故) 첨정(僉正) 김상준(金商濬)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든 지가 이미 13년이 되었습니다.
홍씨의 그전 병은 지금 나아졌고 다른 잘못이 없기 때문에, 온 가문의 의견이 모두 처음처럼 데리고 돌아온 뒤에야 그 여자의 억울함을 씻어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 장가든 김씨도 예의로 맞이하였으며 이미 고명(誥命)을 받들어 명부(命婦)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백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정사에 있어서 마땅히 양쪽을 다 온전히 해 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감히 성급하게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은 고종실록(1896년)의 기록으로 열 살 나이로 시집을 가 병이 들었다하여 쫓겨났다가 병이 회복된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한 여자의 기록이다. 이 여자의 아비가 홍만식이다. 병든 여자는 쫒아낼 수 있고 사대부는 두 정실을 둘 수 없던 시대에 몸이 약한 딸을 시집보냈다가 고군분투(?)하는 조선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슴이 훈훈하다. 홍만식은 13년 만에 딸의 명예와 사랑을 되찾아주는 아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부모의 자식 사랑일 것이다.
홍만식은 당대의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여주부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다가 갑신정변의 주모자 홍영식의 가문이란 이유로 삭탈관직 된 후 고향인근으로 내려가 말년을 보내다가 1905년 을사늑약의 비보를 접한다. 그날 홍만식은 자신의 사랑방에서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날의 비극적 장면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홍만식이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이때 홍만식은 驪州의 本第에서 손님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늑약(勒約)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 한번 변하지 않고 바둑을 다 마친 후, 바둑알을 모두 통에 집어넣고 손님에게 물러가라고 하면서 “내가 무슨 일이 있으니 자네는 속히 가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즉시 衣冠을 차려 입고 집 뒤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사별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와 祠堂에 인사를 드린 후 독약을 타서 올리라는 명을 내려 그것을 마시려고 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 洪杓가 호곡을 하며 약그릇을 엎어 버리자 洪萬植은 그를 물러가라고 꾸짖으면서 “情理上 당연한 일이나 국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갑오년(1894)에 우리 집안에서 伸寃을 한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인 것이다. 法綱이 이러하였으니 어찌 오늘과 같은 변이 없겠느냐? 내가 죽은 후에 白棺에 넣어 「處士」라고 쓰고 선산에 장례를 치르지 말아라. 그리고 너도 평생 동안 죄인 노릇을 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라”고 하였다.
洪杓는 또 청하기를, “한번 상소를 하시어 혹 開悟하기를 기다렸다가 만일 아무 윤허가 없으면 그때 자결하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홍만식은 탄식하며 “時事를 알 만하니 忠言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라고 한 후 그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홍만식은 역적가문의 일원이란 오명을 쓰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숨어사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 처지에서도 홍만식은 충과 효를 다하고 있다. 곡을 하며 말리는 아들을 달래고 어르며 선비가 죽을 자리를 찾고 결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장은 참으로 의인의 모습이다. 두던 바둑 한판을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부모의 묘소와 사당에 마지막 인사를하고 자결을 하는 모습은 숙연하다.
대장부의 마지막 가는 길은 이런 것이다. 순간에 죽더라도 두던 바둑은 끝내고 가야한다는 것 부모 묘에 인사를 드리고 사당에 고유하는 모습은 아들에게 말이 필요 없는 산교육이다.
완고한 조선선비의 모습이랄 수 있겠지만 딸에게는 말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아들에겐 행동하는 양심으로 의(義)를 심어준 홍만식의 모습은 참으로 교육적이다.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물려주려다 끝내 망신살을 사고 돈 되는 직업(?)은 자식의 소질에 관계없이 물려주려는 오늘날의 흔한 부모상에 비추어 보면 홍만식의 그것은 빛나는 모습이다. 밤하늘의 별이라 하겠다. 아니 어떤 별이 이보다 빛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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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선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