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패자를 꿈꾸던 '부견'은 동진(東晋)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려고 112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벌(南伐)에 나섰다가 회수(淮水)의 남쪽 지류인 비수(肥水) 싸움에서 동진의 재상 사안(謝安)의 전략에 말려들어 불과 8만 군사에게 대패하고 만다. 338년 8월의 일로 우리 역사로는 고구려 소수림왕시대에 해당한다.

전쟁은 이렇게 전개된다. 부견의 아우로 전진의 총사령관이던 부융(融)이 동진의 선봉장 사현(謝玄)으로부터 비수 강가에 진을 친 그의 군대를 조금 물려주면 남군(南軍)이 비수를 건너가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이에 부융은 비수를 건너는 남군을 섬멸하고자 자신의 군대에게 후퇴명령을 내리는데, 그의 대군이 전쟁에서 패하여 후퇴하라는 줄 알고 서로 밟고 달아나는 바람에 수습할 수 없는 사태로 진행된다.

국립박물관 소장 '사안'의 전쟁장면을 그린 병풍도

사현은 총대장 사안의 밀명을 받고 이런 꾀로 북군(北軍)을 교란시킨 다음 정예 경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비수를 건너 달아나는 대군을 추격,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에 북군은 수십 만의 사상자를 내며 완전 괴멸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부융은 말이 고꾸라져 피살되었고, 부견은 화살에 맞은 채 필마단기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안은 백만대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순간에도 자신의 막사 안에서 태연하게 바둑을 두며 전쟁을 지휘, 승리를 챙긴다. 이것이 사안의 진중 바둑 고사로 이후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까지 한자 문화권의 정치와 군사사(史)에 하나의 모델이 된다. 조선의 28대 군왕들 가운데 사안의 고사를 언급하지 않은 사람은 단종 한명으로 확인될 정도로 사안의 에피소드는 특출난 것이다.

기경이 쓰여진 북위는 5호16국의 분열로 요동치던 중원의 마지막 군웅 북연과 북량을 항복시킨 중원 북쪽의 패자다. 화북의 패자 북위와 화남의 남송이 더불어 중원을 양분했던 남북조시대는 589년까지 계속된다.

이 시대 중원에서 활약한 명사가 한명 있다. 그 사람이 '사령운'(謝靈運)이다. 사령운은 동진의 총사령관인 사안의 손자이기도 하다. 사령운은 이 시대에 남산에서 북산으로 여행을 하며 호수를 바라본다(於南山往北山經湖中瞻眺)라는 긴 제목의 시를 쓴다. 이 시는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남진우가 쓴 긴 제목의 '로토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의 원조(?)격인 시다.


바둑의 묘리는선수를 다투는 것과 패를 잘 이용하는 데에 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형세를 잘 살펴 운영하는 자다.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이치에 못 미친 자다. 바둑의 묘리는 그 어디 먼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졸렬한 문장을 한편 짓는데도 방도가 있듯 이런 점을 살핀다면 큰 실수가 없다.

[而有尋兩之行。入境侵彊，常存先手。凡為之劫，勝者先營形勢，輸籌弱者，不須為此。如其謀大，方可救之自外，小行 之間，理須停 手。雖復文詞寡拙，物理可依。據斯行者，保存無失] -돈황기경



기경의 세번째 문장은 선수와 패 그리고 형세 파악의 힘을 강조한다. 기경은 졸렬한 글짓기를 하는 데도 방도가 있다고 하며 바둑의 특성을 말한다. 기경이 쓰여진 시대는 긴 전쟁과 그 전쟁 속에서 꽃 피워진 문원(文苑)의 발아는 바둑을 바둑에 그치지 않고 바둑 속에서 그 무엇을 찾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