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정독했다. 예전에 다이제스트판으로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큰맘(?) 먹고 일독을 했다. 동방견문록은 사실 원본이 없이 150여 종 파본이 유럽 전지역에 흩어져 있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중요하고 내밀한 것이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다.

동방견문록은 480쪽  분량에 생소한 지명과 건조한 문체 등 읽기에 아주 불편한 책이다. 필자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박우석의 <바둑철학>을 읽고 난 후였다. 박우석은 바둑철학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바둑과 연관지어 언급했고 그 이유를 이승우의 <바둑이야기>를 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의 바둑교류는 동방견문록이 처음이란 것이다. 그 속에 바둑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읽은 동방견문록(동서문화사 간 채의순 역)에는 바둑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의 바둑실력을 인정하고 고려 바둑 고수들을 대도(북경)에 초대하여 우대했던 원나라 5대 황제 쿠빌라이(1260-1294)에 대한 세밀한 언급이 있어 기쁨을 준다.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바둑 고수 세명을 초청하여 간다. 조정통, 곽희분, 설성경이 그들이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지근에서 보고 이렇게 기록한다.

칸의 신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키이며 단정한 외모다. 두툼한 균형잡힌 팔 다리에 흰 살결 불그스름한 얼국색에 검은 눈동자와 오똑한 코를 갖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본 쿠빌라이는 미남이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가 정실에게서 21남(男)을, 후실에서 25남(男)을 생산했다고 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취미생활을 기록하며 1만 명의 군사와 5천 마리의 사냥개, 그리고 수천 마리의 매로 구성된  팀으로 즐기는 사냥을 들었다.

쿠빌라이는 고려 충렬왕에게 자신의 딸 쿠트로카이미시(帝國大長公主)를 시집 보내 고려를 우대(?)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우대한 것은 충렬왕의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다. 원종은 원나라 황제 뭉케를 만나러 중국에 갔다가 뭉케가 갑자기 사망하자 6천 리 중국땅을 탐문 끝에 무한지방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나  교분을 튼 인연이 있다.

고려는 1231년 이래 수십년간 몽골에 항쟁해 왔으나, 쿠빌라이의 집권을 계기로 화해 무드가 급속히 조성되었다. 1260년, 아리크부카에 대항하려고 막 남송 원정을 접고 북상하려던 참의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태자가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했고, 그 태자가 고려 제24대 왕 원종이 됨으로써 오랜 여몽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다.

쿠빌라이는 고려 원종의 행보에 감동을 하고 그 아들에게 자신의 정실 딸을 시집 보내고 여러가지 호의(?)를 고려에 베푼다. 이후 고려의는 원의 속국(?)이란 오명을 쓰기도 하지만 고려왕 중 한명은 원조정 전체의 서열 3위의 영향력으로 원 황제의 등극 절차에도 힘을 쓰는 왕이 나왔을 정도다.

원과 고려의 바둑기록은 고려사에 두 건이 있다.

충렬왕 1년 1274년의 기록이다.  이부 원외랑 곽희분과 조정통이 바둑을 잘 두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원으로 들어갔다.

두번째는 고려사 열전의 설성경조다.

바둑과 의술에 조예가 있던 설선경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원에 갔다. 황제가 설성경을 불러 바둑두는 것을 보곤 했다. 2년 후 설이 고려로 돌아오자 큰 상을 내렸다.

(入至圍碁於前親臨觀之留二年告歸也. 祖賞甚厚)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고려의  바둑인을 우대하고 격려했던 쿠빌라이의 용모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의 거창하고 위력적인 사냥방식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연구과정 없는 바둑 글쓰기에도 반성을 준다. 무엇인가를 쓰고자 한다면 최소한 원본은 읽어본 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