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땅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남긴 자취가 자못 여운이 있었던지 조선의 뚜루한 문인들이 자신의 글 속에 그녀를 기록한다. 신위(申緯), 이유원(李裕元), 오세창(吳世昌)이 그들이다. 그들이 남긴 책은  경수당전고, 임하필기. 근역서화징이다.

음악에 밝고 바둑을 잘 두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경혜여사(景慧女史)'. 18세기를 살았던 권상신(1759-1824)의 첩으로 기생 신분이었다. 경혜여사는 권상신과 살다가 그가  죽자 다른 무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金景蕙女史 善琴棋工詩畫 卽故權西漁尙書寵姬也 自哭西漁 流落人間 復爲一武弁所收 然非其志也) 전한다.
신위와 오세창은 경혜여사가 시를 잘 지었다고 하면서도 완전한 시를 기록하지 못했는데  이유원(1814-1888)은 그녀의 온전한 시 한편을 포착해 놓고 있다. 경혜여사는 당대의 문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추우면 사람 곁을 떠나고 따스하면 돌아오니 

       제비의 생각이 맞는지 그른지 웃는다.
        
       녹음 좋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이집 저집 처마를 정처없이 기웃거린다.

        (寒便辭人暖便歸.笑他燕子計全非 .綠陰如此不留宿. 却傍人家門戶飛)

(이항복의 초상화. 그의 후손 이유원의 화제가 보인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팔던 시대의 풍경이지만 싸늘(?)하다. 오늘날도 비슷하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당대의 현실은 큰 차이겠다. 경혜여사는 이 시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다. 이집 저집 처마밑을 전전하는 제비가 기생신분과 무엇이 다르냐 묻고 있다. 오늘날  음악에 밝고  바둑 잘 두는 여자라면 어떨까. 그런 여자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간혹 필자는 '과거에도 여자들이 바둑을 두었을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 대답을 하면 곧바로 반문이 날아온다. '기생들에게 한정된 거' 아니냐는 것이다. 필자는 다시 말해준다. '기생도 바둑을 알았겠지만 일반여성들 사이에 더 유행했다'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의 역사에 바둑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기생 궁인 사대부의 부인이나 여식 등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시도 여성의 작품이다. 고려시대 여성인 동인홍(動仁紅)이 그녀다. 동인홍은  13세기의 또 다른 유녀 우돌 (于乭)과는 다르게 생몰 연대가 명확하지 않는데  시의 내용으로 보면 고려초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12세기쯤의 여자로 여겨진다.

(太守分營一局棋/夢不知生死/幸逢榛洧會/芍藥贈如何/買酒羅裳解/召君玉手謠.)

위의 시를 '이상보' '정비석' 등이 선역을 한 바 있는데 무엇인가 답답한 구석이 있고 기(棋)자를 두고 바둑이다 장기다 하며 다투는 사람들까지 있어 실소를 금한다. 필자가 보기에 다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을 다투니 식자우환이 남의 일이 아니다.

태수께서 편을 갈라 바둑 장기판 벌이시니

진수 유수의 만남인양 만나게 된것 반가워라.

어찌 내게 함박꽃을 건네시는지.

술을 준비하고 치맛단 풀려 하니

님 부르며 예쁜 손 흔든다네. 


태수는 신라시대 지방 관직(삼국사기 경덕왕조 757년에 115명의 지방 태수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의 이름이니 이 시가 고려초 생산된 것임을 말해준다. 분영(分營)은 군대를 나눈다는 뜻이니 '이곳에서는 편을 가르다'이고  일국(一局)은 '한판의 바둑'이며   일기(一棋)는 '장기'를 말한다. 局棋는 바둑과 장기를 함께 이른 말이다. 바둑을 둘 줄 아는사람들과 장기를 둘 줄 아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바둑 장기판을 벌린 것이겠다.

설문에 국(局)은 '서두르다'는 뜻으로 나온다. '바둑'이란 뜻도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태수분영을 태수에게 지방 병마사가 찾아온 것으로 해석을 한다. 병마사는 고려시대 지방 위수사령관이다. 위수사령관이 군수급의 관원을 찾아가 바둑을 두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누다(分)를 아예 무시한 해독은 동조할 수 없다. 

동인홍은 자못 도전적이다. 유녀가 노는 여자이기는 하나 이렇게 노골적인 언사는 놀랍다. 동인홍은 술을 준비하고 치맛단을 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녀의 또 다른 시, 자서(自敍)는 창녀와 양가집 규수의 차이가 무엇이냐 묻고 있다. 참으로 거침 없는 여자다.

동인홍의 시는 바둑이라는 세계 안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바둑 장기를 아우르는 단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을 거쳐 구한말까지 동인홍, 허초희, 일지홍, 영수합서씨, 나혜석 등  바둑담을 남긴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의 바둑담은 양반 상놈을 따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여성들이 바둑을 두었냐는 식의 우매한 질문은 더이상 하지 말자. 오로의 천사 AKARI 님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