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도사(道史)편찬위원회'에서 발굴, 탈초한 '지규식일기'와 필자가 발굴, 소개한 '갑오음청록'에는 1894년 경성(한양) 진고개 '박국'이란 기원이 등장한다. 같은 시대 두 사람의 기록에 등장하는 진고개 박국'은 경성의 바둑인들이 모여 바둑을 두고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진고개(尼峙)의 '박국'으로만 소개되어 아쉬웠는데 박국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소개를 한다. 자료는 1902년 4월15일자 '황성신문'이다. 이날 2면에는 4단 기사로 다음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인 율림씨(栗林氏)가 진고개에 일가회(一家會)라는 바둑모임을 만들었다. 회원은 20명이고 하루 입장료는 1원(元)이다.

(황성신문)

이 기록은 필자가 얼마전 발굴한 금서봉삼랑(今西峰三郞)의 1902년 일기의 기록과 같은 시기의 기록으로 이 시대 기원개설이 경성에만 국한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일가회'는 바둑동호회라고 볼수도 있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출입료로 1원을 받는 다는 것으로 보아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한사람 금서봉삼랑은 1882년 부산에 들어와 주류 양곡업으로 부를 이룬 인물이다. 그 사람이 초량동에 기원을 개설한 것이다.

- 정(町)기원에 나와 기로회 사람 다섯 명이 모였다. 회원들의 안부와 '참사회' 일을 논의하고 바둑을 두었다.

'참사회'는 당시 부산에 들어와 있던 일본거류민단의 자치기구다. 일본은 조일간의 조약을 빌미로 이미 1891년 '거류지 규칙'을 만들어 자치를 하면서 부산 안에 작은 일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정기원에는 일본인들만 출입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 못지않은 바둑의 붐이 조성되어 있던 조선인지라 바둑은 조일간의 간격을 좁히는 좋은 문화적 매개였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진고개 박국을 시작으로 경성이나 부산 등 대도시까지 바둑으로 소일을 하던 공간이 생긴 것이 1900년 초반임을 알게 된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보이는 종로위기교습소'도 그런 경우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급박한 조선의 현실을 바둑에 비교한 명 사설을 싣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과 견줄만한 명문이다.

- 경인 경부 철도 부설권과 항구조계 요구는 일본이 우리에게 선수를 가한 것이다. 선수를 당한 것에만 비분강개할 것이 아니라 다음의 수를 생각하여  더이상의 낭패를 당해선 안될 것이다. 이것이 위기자(圍碁者)의 당국자미(當局者迷)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는 이 땅의 최고(최초)의 기원을 '조선기원'과 ' 한성기원'으로 알고 있다. 모두 1940-50년대 기원으로 '조남철'을 기준으로 하다보니 나온 인식이다. 조남철 자신도 경성의 한 위기교습소에서 바둑을 배웠다 고백한(자서전) 육성을 볼 때에도 40년대 이전에 이미 바둑의 풍성한 문화가 존재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은 빼고라는 궁색한 변명은 하지 말자. 이런 변명은 상식적이지도 타당치도 않다.

구한말 조선에는 풍부한 바둑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기능하고 있었다. 하여 당대의 신문인 황성신문이 '전 조선인을 상대'로 일본의 침략야욕을 바둑에 빗대어 공박할 정도인 것이다. 위기십결의 인식이 조선인들 사이에 큰 공감을 떨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일인의 공로(?)로 치부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찰지고 튼실했던 당시대의 바둑문화를 모독하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