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畵員)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던 조선은 도화서를 예조의 아문(衙門)에 소속을 두게 하고 화원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자주 사생대회를 열고 화제(畵題)를 제시하곤 했는데 그 화제에 바둑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화원(畵院)은 도화서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성종 때 설치된 종6품관이 책임관인 독립 관청으로 예조판서의 관리를 받았다. 경국대전에는 20명의 화원과 10여 명의 예비화원과 관리 서리 등 20명의 기타직의 편재로 되어 있다.

책임자는 종6품관인 문반이었으나 화원의 수장인 선화원(善畵員)이 종6품관인 것을 보면 화원들에게 어느 정도 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원들은 기본적으로 매와 죽(梅竹) 그리고 산수화(山水畵)에 능한 자들로 왕실의 각종 행사와 국가의 중요 행사를 기록하는 것을 임무로 실사(實寫)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화원들은 국가의 중대사 외에도 군왕의 관심사항에도 대응해야 했다. 금강산이나 대동강 관민 연회 등을 실화로 그려 군왕의 이해를 도왔던 것이다. 군왕은 간혹 화원들을 불러 모아 즉석 사생대회를 열곤 했다. 화원들의 사기앙양과 실력향상을 위한 조치였다. 사생대회에서 잘 그려진 그림들은 표구가 되어 궁안에 보관되고 때로는 대신들에게 선물되기도 했다.

순조 9년(1809) 군왕은 도화서 화원 전원을 소집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화제는 임하문기성(林下聞碁聲)이었다. 숲속에서 들리는 바둑 두는 소리를 그려내란 것이다.

이때 군왕의 나이 20세였다. 조정은 '벽파'정권이 '시파'로 넘어가고 함경도에서는 홍경래가 한판 세상을 뒤엎을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하수상한 때 군왕은 임하문기성을 화제로 화원들의 사생대회를 열고 있는 것이다.

순조는 5년 전에도 규장각에 화원들을 불러놓고 인물산수화를 그려내게 한 바 있다. 그날 김홍도가 그려낸 그림이 '백학관기(百鶴觀碁)'다. 백학관기 또한 임하문기성의 다른 표현으로 김홍도는 그날 삼상이(三上二)의 품평을 받는다. 김홍도보다 더 뛰어난 등급을 받은 화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임하문기성이나 백학관기는 '소식(蘇軾)'의 저 유명한 시와 일화에서 유례한 것으로 산수간에 유유자적하던 문인들의 아취가 살아있는 말이다.
조선은 금기서화(琴碁書畵)의 바탕 위에서 바둑을 소요와 우미(優美)를 대변하는 고상한 풍류로 인식했다. 바둑이 오락과 유흥의 소일거리 중 가장 탁월한 종목으로 유행하던 조선후기에도 바둑의 인식이 여전히 군왕 앞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오로봉 앞 백학사 터에/ 늙은 소나무 정원을 꾸미고/ 시원한 바람 너무 좋아/

혼자서 숲속을 거니노니/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고 / 어느 집 앞 누군가 바둑을 두는지/

방문 앞에 신발 두짝/ 말소리 없이 바둑돌 소리/ 바둑판 앞에 앉은 두 사람/

깊은 생각에 빠졌는데/ 물속에 주낙를 드린 듯/ 빙어와 잉어라도 낚으려는지/

어린아이도 배우고 익히면 도를 안다네/ 이기면 기분 좋고/ 져도 또한 그러하리/

근심이여 즐거움이여/ 나도 저리 살까하네/

-백학관기-

화원들에게 바둑을 화제로 한 사생대회는 헌종15년, 철종13년, 고종4년 등에도 있었는데 그날 그려진 그림들은 '백학관기' '임하문기성' '고송유수간' '성산사호' 등에 국한된다.

사실 소식의 '관기'는 은일한 군자의 삶을 기품 있게 그리고 있는 명문장이다. 벼슬에서 충(忠)을 행하고 물러나 은일한 삶을 관조하며 살겠다는 동양 식자층의 은퇴생활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글이다. 선비의 이상적 삶의 모습을 군왕이 화제로 삼은 것에 불과한 것을 바둑의 자랑(?)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있겠으나 바둑을 화제로 삼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실록에 헌종 철종 순조와 직접 연관된 바둑 기록은 없다. 그런데도 일성록 등 여타 기록에 바둑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 군왕들도 바둑을 잘 이해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화원 화원들의 덕목은 오직 화력(畵力)이었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이것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이상좌(李上佐) 김홍도 등이다. 이상좌는 그림으로 천민에서 해방되었고 김홍도는 찰방 현감 자리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그들 화원들은 군왕 앞에서 바둑을 그리는 한편 일반인들의 바둑을 그리기도 했다.  김홍도는 장혼의 무리를 따라가 시사(詩社)를 스케치했고 강세황은 바둑연회를 따라가 그린 적이 있다. 조희룡 조영석 등도 예외가 아니다.

군왕 앞에 당대의 일류 화가들이 모여  바둑을 그림의 소재로 사생대회를 연다는 것, 풍류를 안다는 사람들이 산으로 강으로 야유회를 가면서 바둑판을 들고가 즐기면서 화가를 한명 모시고가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간다는 것은  참으로 조선의 특별한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