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은 용재총화를 지은 사람으로 박식하고 유머까지 있어 위아래 신망이 두루 있던 사람이다. 타고난 문장과 학식의 소유자기도 했다. 성현은 어느날 성종에게 임금의 바른 정치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임금 자신이 바른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부터 임금으로서 간사하고 아첨한 자의 해(害)가 전대(前代)의 업적을 패망시킨 것을 누가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전철(前轍)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를 들면,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자는 승패(勝敗)를 알 수 있으나 직접 두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막연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길흉 소장(吉凶消長)의 이치를 아시고, 진퇴 존망(進退存亡)의 기미를 연구하시어 밝게 사람을 살피시고, 강하게 간사함을 제거하여 용렬한 무리로 하여금 조정(朝廷)에 용납할 수 없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그 한량이 있겠습니까?

성현은 세상의 이치를 바둑에 비교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훈수꾼의 눈에는 잘 보이는 수가 대국 당사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법을 고려하라는 말을 한다. 세상 이치도 그러할진대 국왕의 눈은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조정에서는 매년 3월과 9월에 기로연을 열어 조정의 노대신과 은퇴자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예조판서가 책임자로 장악원 악대와 궁중 무희들까지 동원한 성대한 행사였던 모양이다.

기로연에는 바둑기물이 놓여져 있고 판을 벌여 진자가 승자에게 술 한잔을 올리고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시를 짓는 등 자못 흥취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로연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풍습이다. 관료의 은퇴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술과 음악 그리고 시와 바둑으로 여생을 소일하던 풍습인 것이다.

성현은 한양에 많은 기로회가 있다고 했다. 자신은 아연과 칠패 두 곳의 기로회에 출입을 했다고 한다. 아연은 전란 중에 없어지고 칠패는 계속되었는데 한때는 모이는 자가 70명이 된다고 했다.

하는 일은 바둑과 시짓기 그리고 술과 노래하기였다고 한다. 술은 필시 바둑으로 인한 내기였을 것이다. 성현이 본 기로회는 영락없는 기원의 풍경이다. 바둑을 두기 위해 모여 술내기 점심내기 한판...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 한번 걸판지게 부르는 80년대의 기원풍경에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시대 중국의 도회지에는 기원이 있었다. 기원에는 고수들이 바둑을 두고 구경꾼들이 모여 돈을 걸고 일종의 투전을 했고 그것은 공식적이었다.

성현은 바둑광이었다. 아니 이시대의 대부분의 관료와 문인들은 바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대단했다. 성현은 여러 편의 바둑시도 남기지만 실록 속에서 그의 바둑관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엎드려 바라옵기를 상께서는 공의를 살피고 물망 있는 자를 널리 찾아 쓰시옵소서. 그 사양하고 자랑하지 않는 자는 뜻이 가상하고 신중하고 가납한 자는 스스로 아량이 있는 것입니다. 청렴하고 뜻이 돌같이 굳은 자는 지조가 있는 자이니 반듯이 이런 사람을 가려 쓰소서.

(伏願殿下博採公議, 廣詢物望。 其有恬退不伐, 則其志可尙, 謙恭不伐, 則其志可取, 重厚簡默, 則有容人之量, 廉潔淸諒, 則有介石之操, 必考其德行而進之, 使僥倖之徒不得冒進, 則庶績咸熙, 而國家自安矣。조선실록)

성현의 이 상소를 보고 성종은 알았다 말하지만 그날 밤 그를 따로 불러 술 한잔을 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가려 쓴 것이 바른 정치의 요체라 간하는 성현의 주청은 나무랄 데가 없다. 특히 국정 운영을 하는 데 있어 바둑의 격언을 잊지 말라는 대목은 압권이다.

훈수꾼의 눈에도 보이는 쉬운 수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둑을 두며 욕심이 심하면 쉬운 수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소탐대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종은 실제로 자신의 통치 기간에 성현의 이 간언에 충실한 인재 등용을 한다.

조선조를 통털어 민가를 가장 많이 암행한 왕도 그다. 그의 기행적인 암행을 통하여 발탁된 관원들도 여럿이다. 그러나 성종은 바둑을 잘 두지 못했다. 성리학의 발전과 함께 성종을 둘러싼 학자풍의 신하들의 등쌀이 그를 바둑에 매달리게 놔두지를 않은 탓이다.

곁에서 편한 마음으로 바둑판을 보는 자는 승패를 쉽게 알 수 있으나 대국자는 그저 막연하여 깜깜하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진정 필요한 말이다. 400년 전 저 아득한 구중궁궐 안의 얘기다. 바둑이 한갓 도락에서 삶의 철학으로 인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