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陰의 세월 바둑의 세월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있다.  돈 없고 빽 없는 서울의 소시민이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버스 종점에서 술 한잔하며 회포를 풀고, 그나마 허름한 선술집도 저어되는 가난한 가장은 종점에 보이는 전등빛이 슬프다는 뭐 그런 노래로 기억된다. 그런데 마포는 의외로 역사가 긴 듯하다. 조선초기의 문인인 서거정(1420-1488)은 말년에 마포 강변을 자주 왔던 듯 '마포야우(麻浦夜雨)'라는 시를 한 수 남기고 있다.

百年身世政悠悠./夜雨江湖怠起秋.

皺裏歸田今有賦./己倂終老白鷗.

백년 신세 정녕 나른하다.

강호의 밤비가 근심을 일으키네

소매속에 귀거래사 항상 있었으나

지금에사 갈매기를 벗삼아 늙어지고.

이 시에 나오는 마포가 오늘날의 그 마포인지를 가릴 필요는 없겠다. [바둑傳]이 고증을 통한 글쓰기임을 자임은 하고 있으나 이 점은 필자도 자신을 하지 못하겠다.

서거정은 전형적인 복지부동형의 관료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대를 살면서 45년간 벼슬을 한 사람이다. 문장이 당대의 일인자였고 바둑의 고수기도 했다. 서거정은 바둑관계의 글을 이십여 편이나 남기기도 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단종 사건이라는 엄청난 격변이 있었던 시기다. 그의 지인들 중 성삼문 하위지 등이 불귀의 객이 되었고 김시습 등이 세상을 등진 반목의 시대에 서거정의 행보는 양지만을 찾아 걷는다. 이 점을 서거정은 말년에 아프게 토로한다.

허전한 삶 사십을 지나 오십도 지났다.

아름다운 경치 듣기 좋은 노래로 세상을 살았지만

물러나 가을 달빛을 친구 삼자니

겨우겨우 술타령으로  광음을 보내도다.

사실 서거정의 진면모는 조선실록에 있다. 그는 세조의 지방 방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장하고 도도한 경륜이 담긴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오래도 살기도 했지만 역사에 남긴 족적도 컸다.

옛날에 천자가 순수(巡狩)할 때 제후(諸侯)들이 각각 방악(方岳)에서 조회(朝會)하였다면 이것은 제후(諸侯)들이 조회하던 일정한 곳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여, 바닷가의 조그만 고을에까지 이르러 순수(巡狩)를 행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비록 폐단을 줄이고자 하시지만 폐단이 장차 커질 것이며, 또한 고제(古制)와도 달라질 것입니다.

(古者天子巡狩, 諸侯各朝于方岳, 則是朝諸侯有常處也。 今大駕南巡, 至于沿海小邑, 莫不巡狩, 則雖欲省弊, 而弊將巨矣, 亦與古制異矣)

그러나 서거정은 계유정난으로 박살이 난 집현전 친구들에게 항상 마음의 빚이 있었고 번민을 하기도 한다. 말년의 서거정은 술과 바둑으로 미친 듯 산다. 술로 날을 새고 바둑으로 밤을 새웠다는 시도 있다. 술이 등장 하면 언제나 바둑이 함께 등장하는데 이런 시가 대부분이다.

친구가 와 바둑판 늘어 놓고 앉아

한판에 술 한잔

친구가 먼저 취해 돌아가고자 하면

연잎을 따와 시를 한 수 청한다네.

서거정은 한명희나 신숙주 같은 노회한 정치가와는 달리 자유분방함으로 시와 학문에 관심이 많아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동국통감'이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이 그렇고 '필원잡기'와 '주역찬' 등의 저술이 있다.
동시에 서거정의 바둑 사랑은 병적이다. 술과 바둑으로 삼 일을 새운 적도 있을 정도다. 서거정은 어느날 술이 잔뜩 취해 바둑 상대를 찾다가 인근에서 한 꼬마를 데려와 한판 대국을 벌이고는 패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내 술실력은 소동파와 견주고

바둑은 왕안석과 비슷하련만

스스로 묻노니 나의 재주 얼마려노.

백가지 재주가 모두 허사로세.

술, 바둑, 문장에 모두 자신이 있던 당대의 고수가 한칼에 어린 꼬마에게 날라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거정은 이후로 더욱 술과 바둑에 정진(?)하다 명을 접는다. 그때의 모습은 아마 폐인에 다름 아니었을 듯하다. 오늘 서거정의 시를 읽으며 '난가'가 떠오른다. 마포...

마포는 종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