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금기서화(琴棋書畵)라는 인식하에 예도(藝道)라는 가치를 부여받은 것은 바둑의 정적인 속성과 심오한 수상(數象)의 탓이다. 예도가 예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노선과 궁극의 도달점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도는 가장 동양적인 전통적 사고체계라 할 수 있다. 예도는 동양문화의 전반에 퍼져 바둑은 물론 서예, 음악, 그림, 다도, 심지어 궁술, 무도까지도 예도를 자임하며 가치를 추구한다.

동양의 예도는 음악에서 출발했다. 樂과 巫, 樂과 史가 중요시 되던 고대국가 시대에도 음악은 악교(樂敎)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공자는 인(仁)을 펼치기에 예교(禮敎)와 악교(樂敎)만한 것이 없다고 했고 스스로 시경 3백 수를 모두 노래로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렇듯 시악일체(詩樂一體) 속에서 태동한 것이 금기서화다. 음악 바둑 서예 그림은 모두 예도의 산물인 것이다.

18세기 조선은 급격하게 발전한다. 시골 사람들이 한양에 와 길을 잃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상업화도 보폭을 함께 했다. 도시화와 상업화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 이 속에서 퇴폐와 도박 등의 소비풍조도 생겨난다.
바둑은 사회의 풍부한 소비적 양태 속에서 도박과 연결되면서 급격하게 발전한다(특히 바둑의 도박이 심했던 청나라의 영향도 지대했다) 전 조선의 바둑의 고수들이 한양으로 집결하며 그들간의 쟁패가 벌어졌고 자연스럽게 서열화가 이루어진다.

고수들의 서열화는 필연적으로 기단(碁檀)을 형성하게 되었고 기단의 쟁패사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기 시작한 사회 유력층의 후원이 뒤따르게 된다. 중국은 일찍부터 바둑이 유력한 도박의 한 종목이었다.
중국바둑은 16세기를 정점으로 거대한 바둑계가 만들어져 청나라까지 연결된다. '망우청락집' '적정록' '기청하관혁' 등 거창한 바둑전문서가 만들어졌고 60여 명의 고수들의 근황이 전해질 정도다. 동시대 '좌은담총' '난가당당화' 등이 전하는 일본보다도 더 튼실한 바둑의 자료가 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은 오지랖도 넓어 '일본' '유구'의 바둑 기보를 채집하여 자료로 남긴다. '조선고적보'라는 책에는 조선바둑의 근황을 전하기도 한다. 그저 호기심에서 자료 몇 권 찾아만 봐도 이렇듯 자료가 줄비한 데도, 한줌의 고민도 성의도 없이 자료 부족만을 운운하던 한국 바둑사의 몰골(?)이 그저 부끄럽다.

하야시겐비(林元美)가 지은 '난가당당화'에는 청나라의 고수 '정난여'가 등장한다. '기청하관혁선'에 황룡사-서성우-범서방으로 이어지는 중국 바둑의 절대고수의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난가당당화는 '오다노부나가'의 죽음을 바둑과 연결지어 극적으로 기록한 다소간 신빙성이 없는 책이다.
이 책에는' 본인방사스께'와 '이노우에인세끼'가 정난여의 기보를 보고 3단 또는 5단 정도라는 평을 한다.

이들이 말하는 단(段)은 기경(碁經)에 전하는 바둑의 품계로 송나라 사람 '장의'가 지은 책에 처음 보이는 말이다. 장의는 위기구품으로 3단을 투력(鬪力), 5단을 용지(用知)라 했다. 일본의 두 명의 고수가 중국에서 건너온 위기구품으로 중국의 바둑을 평가하는 모습이 희극적이다.
정난여의 바둑은 오늘날의 바둑 수준에서도 프로급 수준이다. 많은 프로들이 그런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바야흐로 18세기 한중일의 바둑은 만개를 했다. 수십 수백 명의 고수군이 등장하여 서로 소통을 하면서 서열화를 가리는 쟁패사를 쓰기 시작하며 바둑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중국의 '과백령'과 '주라예'의 북경 쟁패나 일본의 '야스이산지'와 '본인방 도에쓰'의 운명의 60국 대결이 그것들이다.
이 비슷한 시기 보성 출신 정운창은 조선 제일의 국기 김종귀를 찾아 경기 황해도를 거쳐 서북지역을 샅샅히 뒤지고 다닌다. 이처럼 바둑이 일생을 헌신할만한 가치(價値)로 자리잡았고, 사회는 신드롬을 만들어 열광적으로 그들을 반긴다.

조선의 절대 고수 김석신은 어느날 한 어린아이의 도전을 받고 꿈꾸 듯 침몰한다. 김석신은 그 아이의 바둑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이 바둑판 아래에서 나오고 숨소리는 어둠 속에서 나왔다(手下於盤息出於暗).

김석신은 김종귀를 꺾은 정운창의 전법 제자다. 김석신은 정운창으로부터 천 판의 지도대국을 받고 그를 극복했다 했다. 그런 김석신이 예측불허의 수와 간단치 않은 승부 호흡을 가진 어린 고수에게 패하고 있다. 
조선의 바둑사는 이렇게 절대고수들의 출현과 세대교체로 점철된다. 유본학이 기록한 시골 향기의 바둑에도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던 말이 허언이 아니다. 국기(國碁)의 바둑을 한번 보는 것이 당대의 소원이 될 정도로 18세기 바둑의 고수들은 인기 스타였다.
그랬다. 18세기 한양 남산에서 있었던 기회(바둑대회)의 모습이다.

장막이 쳐져 있고 바둑판이 놓여 있다. 상수는 남쪽을 향해 앉고 하수는 북쪽을 향해 앉는다. 하수가 먼저 들어와 상수를 맞이하고 장전(帳典)이 하수에게 술 한잔을 준다. 하수가 술잔을 비우고 술잔을 수건에 깨끗히 닦아 상수에 올린다. 전악(典樂)이 울리고 서로 예를 표한다.

바둑이 시작되면 장막 밖에 설치한 바둑판에 장막 안의 바둑이 전해지고 사방을 에워싼 구경꾼들이 호사를 누린다.

마치 국조오례의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바둑대회의 모습이 참으로 멋지고 장중하다. 대국자들이 술 한잔씩을 마시는 장면과, 첫수 착수시 음악이 연주되는 것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이 기록을 보고서야 조선과 중국 바둑의 기록에 유난히 술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았다. 바둑이 왜 예도인지, 바둑이 왜 음악과 같은 조합으로 빈발하게 등장하는지도 수긍을 했다.

# 바둑전14회 바둑인이 사는법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이해가 빠를듯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대국수 정운창과 김석신의 사실의 기록을 홈페이지 연재소설 청룡도에서 살펴봅시다. 연재소설에 기백 명의 독자는 문제 아닙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