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우리나라에는 순장바둑이라는 고유한 바둑이 있었고 그 바둑의 형식이 일본 중국과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필자가 바둑사에 관심을 두기 전의 일이다.

학문은 의심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한 권의 책이 출간 되었을 때 독자는 그책을 구해 읽으며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책의 진면모를 모두 파악했을 때 비로소 그 책을 다 읽었다 할 것이다. 바둑사에 남보다 조금 지난친(?)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순장바둑이 의문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증주의 역사(歷史)라는 과학적 역사 쓰기 안에서 순장바둑이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역사에 초보적 식견을 갖춘 사람이면 쉽게 알수 있는 것이기에 필자는 당황스럽고 의아했다.

숙종 35년 5월 14일.

청의 사신이 역관을 보내와 박을 잘 두고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 있으면 특별히 보내달라 한다 하자 왕이 조치하라 한다.

又啓曰, 卽者差備譯官來言, 上勅, 欲觀善着碁人, 副勅, 欲聽善彈琴聲, 卽爲覓入云。竝分付入送之意, 敢啓。傳曰, 知道。

숙종 35년 5월 15일.

다음날 청의 사신들은 다시 역관을 보내온다. 영접도감에서는 바둑 고수 장문익과 최세송을 보냈다 보고를 하자 왕이 알았다 하고 있다.

又啓曰, 卽者差備譯官來言, 副勅詣上勅房, 使譯官張文翼·崔世松等, 今方着碁云矣, 敢啓。傳曰, 知道。

청에서 사신이 왔다. 조선실록의 기록이다. 조청간은 한번 사신을 교환할 때면 5백 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움직였다. 조선은 청의 사신 영접을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알았다. 북벌을 운운하던 조선의 반청 기운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던 숙종 임금 시대, 청 사신단은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것이 업무였다. 영접도감은 이런 청 사신단의 심기(心氣) 외교에 대처하며 각종 연회와 놀이로 그들을 회유했다.

청 사신단은 이틀에 걸쳐 자신들의 숙소로 조선의 바둑 고수들을 청했고 영접도감은 장문익, 최설송 등의 고수를 보냈고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이다. 장문익은 조선실록에도 등장하는 당대의 고수다. 북경사행단에 따라가 강희제로부터 신종 황제의 친필을 얻어와 숙종을 기쁘게 한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필자는 순장바둑의 부조화를 느꼈다. 이 연회장에 불려간 조선의 고수들과 청의 사신들은 어떤 바둑을 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순장식 바둑과 중국식 바둑이 마주쳤다면 이날의 바둑은 작파(?)되기 십상일 것이다. 비슷하면서 상당히 다른 두 가지 바둑의 형식이 만나는 순간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인 것이다. 
이날의 바둑은 아마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바둑은 연일 계속된다.조청간의 외교의 장에서 바둑으로 불미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안에서 19로 바둑이 두어진 것을 증거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문집이다. 서거정(1420-1488 )도 19로 바둑을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19로 반상에서 정작 두어지던 바둑의 모습을 증거하는 기록이나 기보가 한 점 없는 것이 한국바둑사의 맹점이다. 이 맹점 속에 19세기 이전의 한국바둑사는 암흑사였고 아무도 그것에 관심두지 않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순장바둑이라는 유령이 또아리를 틀고 한국바둑의 정통으로 분단장을 하면서 시연대회까지 벌어지는 실정이다. 필자는 조선시대에는 순장식 바둑만 둔 것이 아님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양국의 빈번한 바둑의 접촉 속에서 순장식 바둑만을 고집하는 것은 넌센스다.

김창업(1658-1721)은 연행단을 따라 나섰다가 중국인들과 바둑을 두고는 초두(初頭)에 두는 것만 다르고, 조청 바둑은 같다고 했다. 이 초두를 16곳에 놓고 두는 순장바둑의 그것으로 해석하고 조선과 중국의 바둑형식을 해석하는 논자가 있기는 하나, 문헌에 보이는 순장바둑의 특점은 대두점(臺頭點)으로 초두(初頭)가 아니다. 정환용은 '기설'에서 대두점을 잡았다 했다. 대두란 말은 망루(중심)라는 의미로 순장바둑의 그것을 잘 표현한 말이다.

순장바둑의 형식을 전하는 기록은 의외로 많다. 김병언(?-1807)은 가로 세로 흑백을 포진하고 바둑을 시작(縱橫黑白陳如圍)한다 했고, 이서구(1754-1396)는 다수의 지점을 차지하고 두는 바둑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於是左右設奕具進子樞兩階布陣均道一再轉.)
그러나 홍인모의 처 서씨(1544-1610)는 흑과 백을 차례로 거듭하며 판을 시작한다(黑白縱復橫) 했고, 정환직(1843-1907)은 가로 세로 만나는 반상 위에 놓인 네 점으로 승부의 안위를 결정하네(縱橫八方指点四郵一局定安危)라 하고 있다. 이장찬은 이 바둑 저 바둑을 다 졌다(碁他碁不勝) 했다.

그랬다. 조선의 바둑은 16배자(配子.순장식) 4배자(配子.중국식) 형식의 바둑이 혼용으로 두어지고 있었다. 순장이란 말도 정확한 것도 아니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순장바둑을 유성룡이 만든 조선 고유의 것이라면서 일본 정창원 바둑판에 있는 화점을 보고 순장식 화점이니 백제의 것이란 황당한 논지까지 있는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순장식바둑은 고려 이전에도 있었다. 고려시대는 17로, 19로 바둑을 두었던 듯하다. 중국에서 17로 바둑이 19로로 바뀐 것은 6세기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8세기 신라에 왔던 당의 사신단에 바둑고수 양계응이 보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한반도와 중국의 바둑교류의 일면이다. 이들 간에는 이미 16배자 4배자 바둑이 혼용되었을 것이다. 16배자 4배자라는 바둑의 형식은 고대로부터 한중일 간의 통용되던 정보였다.

17로 바둑은 19로 바둑 이후 급격하게 퇴락했지만 고려시대에도 두어졌다. '노걸대언해'에 보이는 바둑, 큰바둑 각 열 벌을 구입했다(碁. 大碁)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정리를 하면 한반도에는 16배자, 4배자 바둑이 혼용되어 두어졌다. 순장바둑만을 둔 것은 아니다. 일본 중국에는 순장바둑이 없었고 순장바둑은 한국 고유의 것이란 말은 억지에 불과하다 하겠다. 한마디로 연구 분발이 필요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