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7월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수개월이 지난 어느날, 경희궁 존현각 지붕 위에는 일단의 자객들이 올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존현각 안에서는 군왕 정조가 책을 보고 있었고 자객들은 각자의 특기 무기인 칼과 철편을 매만지며 지붕을 뛰어내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정조는 금등비서를 읽고 있었다. 금등비서는 선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기록한 책이었다. 정조는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의 친필을 읽어 내려갔다. 금등이란 말은 철사로 단단하게 묶는다는 의미로 주공이 무왕의 병을 대신해 자신이 죽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천륜과 정치 사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영조의 속내가 그 책 속에는 담겨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정치적 희생자라는 것, 사도세자는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열한 살의 나이로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장면을 목도한 정조의 자의식은 사도에 한해서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학문적으로는 주자의 學에 정치적으로는 당태종의 治에 평가되는 인간 정조의 약점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

정조에게 왕권을 물려준 영조는 노론의 군주다. 숙종 사후 소론의 추대를 받던 경종이 갑자기 죽고 뒤를 이어받은 영조는 당대의 정치 세력인 노론의 보위를 받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슬하에 2남 11녀를 두었으나 1남 6녀가 조졸하고 사도와 화평, 화완옹주 등 1남 5녀가 그의 사랑을 받았다. 영조는 자식이라면 죽고 못살던 사람이었다. 시집을 간 화평옹주가 죽자 사가를 찾아가 딸의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을 하며 날을 새울 정도였다.

사도는 장남 효장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영조의 유일한 아들로 영조의 사랑과 총애는 상상 불허였다. 그러나 영민하면서 마음이 유난히 심약한 영조와 남달리 활달하고 예측 불허한 아들의 성격이 빚어내는 불화는 폐세자와 함께 즉결 처단이란 전무후무한 사건을 만들게 된다.

사도는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6명의 사람을 직접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시, 궁녀 심지어 자신의 첩까지도 가리지 않았다. 사도는 한 궁녀를 문숙의와 내통한다는 이유로 직접 목을 잘라 머리를 들고 온 궁안을 돌아다니며 궁녀들에게 겁을 주기도 한다.

이런 광태를 보면서 조정과 주변에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조정은 혼돈이었다. 이 위험천만한 시국에서 사도세자를 가장 먼저 결단하자고 청한 사람은 놀랍게도 사도와 화평 화완옹주의 친모인 선희궁 이씨다. 그녀는 영조를 독대하고 '종묘사직을 위해 대처분을 하소서'라며 주청을 한다.

영조는 울면서 자식을 죽이자는 청을 하는 이씨를 위로하며 즉각 폐세자 영을 내리고 사도를 뒤주 속에 가둔다. 사도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도 자식(정조)만은 보호해야겠다며 방관을 한다. 노론의 유력자이며 사도의 장인인 홍봉한도 방관한다. 홍봉한의 동생은 적극 지지하고 나선다.

사도의 죽음 뒤에는 노론이 있었다. 영조가 노론의 군왕이었던 탓에 사도도 노론의 비호를 받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사도는 노론의 눈 밖에 났었다. 이유는 사도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점이었다. 호방한 기상에 진취적인 포부가 있는 사도는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런 사도가 광기(?)까지 갖고 있기에 노론은 두려워했다. 노론의 두려움은 어린 세손에게 향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군왕의 보복이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영조는 세손을 사도의 호적에서 삭제하고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적에 올리면서까지 세손을 보호한다. 그리고 세손에게 사도의 일로 종묘와 사직을 흔들지 말라 당부하고 당부한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조정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나는 사도의 자식이다'라는 사실을 공표를 한다.

지붕 위에 있던 자객들이 존현각 아래로 뛰어내린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러나 궁을 수비하던 갑사들도 허수아비가 아니다. 백병전이 궁 안에서 벌어지고 사세가 위급함을 안 자객들은 궁궐 담을 넘어 도주를 한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객들은 다음날 곧바로 다시 궁궐을 침범한다. 참으로 대담무쌍한 행동이다. 비상령이 내려진 궁 앞에서 또다시 백병전을 치른 자객들은 몇 명의 사상자와 함께 모두 체포된다. 생포자는 전홍문, 강동위, 고동 등 10여 명이었다. 그들은 즉각 추국을 받는다.

이들은 노론의 대신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동원한 검계의 장사 전홍문, 용호영 무장 강용희, 박혁인 고동(高同) 등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사건의 연류자들인 정후겸 홍술해 등 유력자들이 일망타진된다.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양자로 병조참판에 이르고 있었다. 홍상범, 홍술해 등은 참수되고 정후겸은 북청으로 유배되고 그 외 참가자들은 장 1백 대에 호서의 염전 노비로 부역형을 받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지만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조선 5백년사에 자객이 궁 안에 들어와 군왕의 침전을 직접 타격한 사건은 이 사건의 유일하다.

조희룡은 호산외기에서 바둑 고수로 김종귀, 김한흥, 고동(高同)이 있다고 했다. 김종귀와 김한흥은 이서구, 이옥, 김조순 등의 문집에 약간의 설명이 있기에 형체를 알 수 있었으나 이름뿐이던 고동(高同)은 박혁인(博奕人)이란 이 기록으로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착각을 한다. 화완옹주가 정조의 철천지원수(?)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화완은 정조를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해서 문제였던 여자였다. 화완은 시집을 가 남편이 일찍 죽은 탓에 영조의 특명으로 궁에서 산 여자다. 화완은 어린 세손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마냥 보듬고 독차지해 궁 안에서 문제가 된다. 혜경궁 홍씨가 자식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다고 그녀의 일기에 기록할 정도다.

화완은 그런 홍씨를 미워했다. 남편 일찍 죽고 자식도 없는 젊은 과부의 집착이 어린 세손에게 집중된 것이다. 화완이 친오빠인 사도의 죽음에 일조를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사도의 죽음에는 친모, 아내, 장인, 왕비 김씨 등 모두가 동조를 한 것이며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화완이 양아들 정후겸의 죽음 뒤 그녀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쳐도 서인으로 강등하고 천수를 누리게 한 것도 누구보다 정조가 화완을 잘 알고 있던 때문이다.

역사는 굵은 매듭을 만날 때마다 희생자를 찾는다.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격랑의 매듭에는 화완이라는 요부(?) 희생자를 채택한다. 그것도 정사가 아닌 야사류의 편법을 통해서 말이다.

고동은 정후겸의 후원을 받는 예인이었다. 당대 거문고, 바둑, 화가, 가객의 일류들은 모두 유력자를 후원자로 두고 있었다. 고동이 정후겸과의 인연으로 홍상범이 만든 암살단에 들어 갔다가 장 1백 대를 맞고 호서(湖西)의 염전 노비로 전락, 역사의 한 줄 기록을 남기고 난만(蘭漫)에서 사라진다.

난만은 바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난만'. 어지러운 바둑판이란 의미로 반역의 도모라는 또다른 뜻으로 순조실록에 무려 3회나 출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