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한중일 삼국에 격조 있는 놀이로 인식된 것은 역사 이래의 일이다. 바둑이 도교적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신비적이고 몽환적인 고송유수간(故松有水間) 임송기성(林松碁聲)류의 담론을 만들어온 곳이 중국이라면 일본은 무사도와 연결지어 바둑을 엄격한 예도(藝道)로 승화시켜 왔다. 이와 함께 한국은 신라 이래 유행해온 풍류와 결부지어 허황된 신선담과 숨막히는 예도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한 바둑담을 만들어 왔다.

유달리 바둑과 술, 바둑과 음악이 연결된 에피소드가 한국의 사서(史書)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거점을 떠나 산천을 유람하며 몸과 마음을 살찌운다는 풍류와 무관치 않다. 한중일 동양 삼국은 바둑을 금기시주(琴碁詩酒), 난가(爛柯), '난가당당화'류의 각각의 트랜드로 발전해 왔다.

바둑이 한중일 삼국에 유행한 이래 바둑이 단순 오락의 차원이 아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당(唐)나라 때이다. 난형기(蘭亨記)나 '자치통감' 등에 '금기서화' '기대조' 등이 처음 나타나고 당시(唐詩) 등에도 보인다.

이와 비슷한 시기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연남생 묘지명에 금기서사(琴碁書射)가 보인다. 연남생이 거문고와 바둑 글과 활쏘기에 능했다는 뜻으로 금기서화와 금기서사 등은 당대에 이미 한중 간에 보편적인 것이었다. 화랑세기에는 용춘공이 거문고와 바둑 술로 말년을 보냈다고 하고 있다.

금기서화는 고상하고 기품 있는 문화다. 이 시대 당나라의 중요한 문화는 금기서화가 아니었다. 이백은 웃으며 글을 쓰고 매일 술을 들이키며 시장에서 호방하게 사람을 죽인다(笑書一杯酒殺人都市中) 하고 실제로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
도연명은 칼을 잡고 혼자서 먼곳을 유람하며 주리면 고사리를 먹고 역수의 물을 마신다 한 바 있다. 당시대 중국 식자층의 관심은 다층다의다. 시와 술 살인까지도 취미가 되는 그들의 문화에서 나온 금기서화가 꽃을 피운 곳은 오히려 한국이었다.

- 품격 있고 우아한 삶을 지향하는 식자층들이 동류들과 공유하는 문화적 공통점으로 삼은 것이 바로 금기서화였다.

이 금기서화가 똑부러지게 나타난 한국의 문헌은 이색(1328~1396)의 문집이다. 이색은 금기서화는 우리나라의 풍속에 사절(吾俗謂之四絶)이라 했다. 고려시대 금기서화는 고려의 풍속이 되었고 사예(四藝)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 시대 '해동기로소'에 '금기시주'가 각종 묘지명에 금기(琴碁)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증거다.
금기서화가 가장 잘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 성종실록에 보이는 김극검의 기록이다.

古人云: ‘玩物喪志。’ 又曰: ‘心無兩用。’ 非徒聲色、遊畋, 如琴碁、圖畫、文章、射御之類, 皆足以喪心志, 請每覽經史, 以爲淸心出治之本, 凡干技藝, 勿留念焉。” 傳于承政院曰: “克儉云: ‘凡干技藝, 勿留念。’ 所謂技藝, 指爲何事.

-성종실록-

김극검은 군왕에게 군왕이 지켜야할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색잡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독서나 바둑 등도 지나치면 몸과 마음을 해친다고 하고 있다.

조선은 식자층들 사이에 학문적 소양과 예능적 취미가 어우러진 사람들이 대접을 받았다. 성리학을 통한 학문적 소양 외에 금기서화의 습득과 활용이 사회생활의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성리학자중의 성리학자인 고봉 '기대승'까지도 바둑에 대한 바둑이 단순 오락의 그것이 아닌 신묘한 理와 界가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했다.

조선의 금기서화의 하이라이트는 심익운(1734~?)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한다. 심익운은 친구의 집들이에서 본 '현판'을 기록한다.

- 앞으로 군자, 효자, 충신, 고승....등은 루(樓)의 상석에 앉을 수 있습니다. 서, 화, 금, 기의 가인(佳人)들도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속세의 모든 이들은 이 루에 오르는 것을 사양합니다.

김조순은 풍고집에서 기객, 가인, 금사(琴師) 등을 대동하고 산수간을 찾아 금기서화를 실천한다. 조두순, 이하응, 김옥균 등도 예외가 아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일찍이 풍류는 유불도와는 다른 어떤 것(實乃包含三敎)이라 했다.

조선의 풍류는 한마디로 금기서화였다. 금기서화는 한국인의 풍류적 정서와 가장 잘 맞는 궁합이다. 춤추고 노래하길 즐기던 악(樂)과 예능적 소양과 성취를 자랑하던 서화(書畵), 그리고 놀더라도 격조를 생각하던 기(碁)의 선양은 비로소 한국에서 완성되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