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라는 동물은 다리가 15쌍에서 많게는 170쌍을 이룬다. 풍수학상 지네 터를 길지로 여기는 것은, 지네의 많은 다리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은금 재화를 넘치도록 모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함께 답산 했던 손창하 풍수는 보천교주 차경석이 정읍에서 일어난 점을 강조했었으나 벽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터를 잡을 때엔 음택이든 양택이든 최우선으로 보는 게 물(水口)이다. 그리고 나서 용(龍)을 보는 게 바른 법이다. 그러나 차천자궁은 허허벌판에 세웠으니 용이 전혀 없다. 이런 터는 크게 흥하고 크게 망하는 자리다. 그렇다 해도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던 차경석의 10년 영화가 물거품이 된 것을 손창하는 아쉬워했었다.

“금산사를 정점으로 정읍과 김제에 제왕의 땅이 있었다는 걸 기록하곤 있어요. 그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근동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운한 세상을 살았는지는 필설로 설명할 수 없죠. 아득하기만한 그 옛날의 처참한 상처가 아물었다 생각하는데, 새삼스럽게 일본인들이 남악을 찾는다고 들쑤신 것은 상처를 덧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어요?”

게이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 조부님의 유언을 지키려 한국에 왔어요. 오랫동안 사람을 찾아 헤맸지만 소득이 없었거든요. 며칠 전 일을 의뢰한 흥신소의 연락을 받았어요. 찾는 분의 따님이 주말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나 봐요.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거든요.”

그곳은 가겟방에서 3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게이꼬는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가는 길에 털어놓았다.

“조부님은 강유선(姜瑜瑄)이란 분을 찾으셨어요. 해방 전엔 조선총독부 문서과에 근무했었데요.”

예닐곱 어린애처럼 길거리에 피어 있는 들풀을 장난스럽게 뽑아 보던 게이꼬의 표정이 담담해졌다.

“1945년 5월이었답니다. 한반도 정세가 심각했을 때 총독부에선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대요. 그 동안 충청도와 경상도 일원에서 수탈한 금붙이를 금괴로 만들어 보관해 오다 그걸 가져가기 위해 목포항으로 운반 중이었대요.”

운송 책임자는 정보과 사무관 구로다(黑田)라 했다. 그는 직원들을 목포항으로 보내 출항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된 일이었으나 이들의 움직임은 금괴 사냥꾼에게 노출돼 급습을 받았다.

“구로다를 비롯해 전기응 등이 총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했답니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구로다는 풍수사를 보내 전기응이 그려 준 삼합(三合 ; 유불선의 정기를 합한 땅)의 땅에 금괴를 묻고 한양으로 돌아왔답니다. 스물일곱 명이 떠났지만 서울에 돌아온 건 고작 셋이었대요. 구로다를 비롯해 전기응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풍수사인데, 그분이 저의 조부님에게 보물 지도를 그려 줬답니다.”

‘삼합의 땅이라.’

벽암은 그 땅을 되짚어 보았다. 근자에 들어와 일본인 관광객들이 전라도로 몰리는 것은 게이꼬의 주장대로 보물을 찾으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았다. 그 점이 기분을 묘하게 충동시켰으나 잔뜩 기대하고 게이꼬와 찾아간 주말 농장이 폐쇄된 것을 발견하자 보물이니 남악이니 하는 생각은 안개처럼 스러져 버렸다.

두 동(棟)의 비닐하우스가 세워진 주말 농장은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얼기설기 비닐로 땜질해 놓은 곳은 바람이 불 때마다 상여에 달린 지전(紙錢)처럼 멋대로 휘퍼럭거렸다. 그것만 본다면 영락없는 폐가였다.

“폐쇄시킨 지 얼마 안돼 보이는데요.”

게이꼬는 농장 안을 휘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한 열흘쯤 되었을 겁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김여사가 모두 데려가더라구요.”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마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사내가 술기가 있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중언부언 지껄이는 그의 말을 종합하면, 이 농장은 김경필(金慶弼)이란 지방 유지의 소유였다. 한량 끼가 다분한 그는 본부인에게서 1남1여를 생산했고, 한때 이곳까지 흘러온 강유선(姜瑜瑄)이라는 여인에게 딸 하나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주말농장을 10년간 임대하여 공동생활을 하게 한 장본인이 김경필의 딸 김송자(金松子)였다. 송학수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