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항상(恒常)의 거울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근면과 애민하는 군왕의 모습을 보았다. 영정조 시대 이웃국가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이 차례로 나라를 다스렸다. 영조는 근면 애민이란 점에서 강희제를 많이 닮았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대통을 이어 청나라를 반석 위에 세운 사람이다.

강희제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타고난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스스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기도 하다. 강희제는 대학자 '장옥서'와 이학(성리학)에 대해 토론한다.

강희제가 묻는다. 이학이란 송나라에서 생긴 것이지? 장옥서는 이렇게 답한다. 도리는 본래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만 다만 송대의 학자들이 조금더 자세히 밝힌 것입니다. 강희제는 이렇게 보충한다.

- 날마다 쓰고 행하는 것이 이치(도리) 아닌 것이 없다. 이학이란 명목이 생겨 피차간에 변론을 일삼았을 뿐이다.학자들 자신이 말과 행동이 달랐다. 하는 일이 성실하고 합당하면 그것이 참된 이학이다.
(日用恒行 無非此理 自有理學名目 彼此辯論 而言行不符者 甚多 若不居構學名 而行事允合 此卽眞理學也)

영조는 이웃국가인 청나라의 이런 세계관을 접하면서 조선을 조금씩이나마 변화시키려 했다. 영조의 법통을 이은 정조는 호학군주였다. 스스로 동양 성리학의 법통군자라 생각한 사람이다. 강희제는 정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다. 강희제는 열린 마음은 청나라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희제보다 후학인 정조는 어떤가? 이 물음에서 필자는 강희제의 실용적 자질과 정조의 이상적 자질을 본다. 허황된 공리공담에 빠져 있던 성군 정조의 마음자세가 참으로 조선의 비극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정조는 청나라보다도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했던 것일까? 청나라마저 용도폐기한 성리학의 이상을 붙들고 염불(?)에 몰두했던 정조의 25년이 아쉽기 그지 없다.

혹자는 정조가 청나라에 준동하는 세로운 문명의 도입에 천착하여 눈밝은 신하들을 끝없이 청나라로 보내어 문물을 수용했다 말한다. 그러나 사실의 정조는 그런 일에 별다른 관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사조를 속된 것으로 보고 고문(古文)의 회복을 통해 진정한 공맹의 시대로 돌아가자며 역사의 흐름을 막아선다.

공맹은 미래를 지향하지 않는다. 공맹은 작금의 시대를 반성하고 독려하여 과거로 돌아가자고 한다. 유토피아는 언제나 요순시대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대를 반성하고 독려하여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고 발전일 것이다. 제도와 문명이 아직 싹트지 않는 저 까마득한 요순시대로 돌아가 인간이 무슨 삶과 꿈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이 작업을 위해 규장각에 인재들을 모아 책을 편찬하고 새로 쓰며 단련을 시킨다. 그 과정에 성과도 있다. '무예도보통지' 같은 걸작도 나왔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일은 국왕의 관심과 지원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군왕의 힘은 그 정도는 됐다. 정조의 문제는 바로 이런 사소(?)한 일에 정조 자신이 너무 몰두했던 일이다.

군왕은 '부국강병'이 덕목이다. 정조의 25년간의 치적 중 부국강병과 연결된 것은 별로 없다. 정조가 죽자 겨우 10년 만에 저 엄청난 민중의 항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