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적당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나 곧바로 준동할 건 뻔한 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박종경이 오포장을 지목했다.

"호호 대감 그러합니다. 토포군이 철군하자 벌써 분탕질을 치고 있다는 장계가 올라오고 있지 않는지요?"

"나도 이조와 병조에 보고되는 보고를 알고 있네. 경군은 그런대로 쓸만한데 향군이 약한 것이 흠이야."

박종경은 허약한 지방군을 말했다. 군적에만 살아있는 조선의 지방군은 도적집단 하나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크게 준동해 나올 때를 기다리던지 아니면 원뿌리를 말라 죽이는 것이 방법인 듯합니다."

"하하, 그래서 상한 아전들이 몇인고?"

"호호 그건 죄송합니다."

오포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방산 명화적 소탕작전에서 세 명의 지방 형리들을 고문하다 물고를 내 토포군이 곤경에 처한 것을 박종경이 해결한 바 있었다.

"아니야, 임자들을 꾸짖는 말이 아닐쎄. 장수는 믿음이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이고 그것이 병법이겠지. 박대장?"

"네 말씀히시죠 대감."

박기풍이 박종경의 얼굴을 주시했다. 박종경이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서(史書)에서 효종임금이 정유학에게 한 말을 기억하네."

"입신양명하란 옥음 말입니까?"

"하하, 자네도 아나?"

"우리 무장들은 효종임금의 그 말씀을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효종은 북벌군주로 조선 무장들들의 존경을 받는 군왕이었다. 효종은 대군시절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가 십 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때 세자와 봉림대군을 곤경 속으로 몰던 역관 정명수와 용골대를 용감하게 규탄한 '정뇌경이'이 그들의 역공으로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봉림대군은 피눈물을 쏟으며 자신들을 비호하다 비명에 죽은 정뇌경을 보고 와신상담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군왕이 된 후 정뇌경의 아들을 불러 입신양명하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그가 진사시를 통해 효종 앞에 서자 이렇게 말한다.

(생원·진사가 방방(放榜) 뒤에 사은하였다. 상이 진사시에 장원한 정유악(鄭維岳)을 소견하고 승지 이일상(李一相)에게 이르기를,

“정뇌경(鄭雷卿)의 죽음을 내가 슬퍼하였는데 이제 이 아이가 장성한 것을 보니 슬픔과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고, 또 정유악에게 이르기를,

“너는 반드시 입신 양명하여 원대한 것을 기약해야 한다.”

하였다. 정유악이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하고 이일상이 눈물을 흘리며 당시의 일을 말하니, 상이 또한 슬퍼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효종실록.

원대한 것을 기약해야 한다는 말은 복수를 말한다. 효종은 서슬퍼런 청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하들에게 이런 식으로 내일을 기약하곤 했다. 말을 에둘러 돌려할 수밖에 없는 효종의 입장은 망국의 치욕을 당했던 조선의 실정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대목은 두고두고 조선 무장들의 마음속에 남아 상무정신을 키우게 하는 에피소드가 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요즘 군문에 이효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에 하는 말일쎄."

"이대장이요?"

"맞아. 그 자가 풍고를 바짝 따라다니고 있어."

박종경이 이효헌을 김조순과 연결시켜 말했다. 박종경은 김조순을 경쟁상대로 보는 모양이었다. 박기풍과 오포장은 그걸 간파하는 순간 두 손에 식을땀이 나는 걸 느꼈다. 조선의 거대한 정치적 산맥이 두 개로 갈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