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법과 규범이 희미해지고 조선을 건사하고 있던 신분질서마저 동요하고 있었다. 이제 양반사대부들의 호통도 예전의 범(虎)의 소리가 아니었다. 노비들은 도망가고 소작인들은 백주에 태연히 짐을 싸 타도로 이주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피잔했다. 그들은 삶의 고통 속에서 불만의 똬리를 틀고 언젠고 기회가 오면 자신들의 둥지로 손가락을 밀어넣는 양반사대부들의 손가락을 물어 맹독(猛毒)을 주사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국왕의 것이라 해도 그들은 마다하지 않을 태세였다.

서강에 도착한 오포장은 한 주막의 평상을 차지하고 앉아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주막 안에는 서너 명의 손님들이 더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손에 묵주가 들려 있었다. 천주교도들이었다.

"끌끌... 다른 집으로 가자."

"포장님, 여기가 어때서요?"

가희가 주막을 나가려는 오포장에게 물었다. 오포장은 대꾸도 없이 주막을 나가며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호호, 재수 없는 날이군. 퉤!"

순조 9년에 이르러서 조선의 포교들은 천주교도들을 체포하기보다는 슬슬 피해다녔다. 순조초기에 엄청난 박해를 가하는 최선봉에 섰던 포도청은 악명(?)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순조 1년부터 3년 사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유례가 없는 것으로 조선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경험했다. 이 사건을 역사학자 박종성은 '법과 정치의 긴장'이란 말로 간단하게 설명한 바 있다. 필자도 그의 견해에 동조한다.

정치권력의 상대적 위축이 불러온 민중세력의 성장과 그에 따른 전통의 손실은 혼돈에 대한 법규범과 그에 상응할 새로운 사회가치를 필요로 했다. 신분질서의 해체와 후속문화의 지체는 고스란히 왕조의 아노미로 연결되었다. 때를 맞추어 일기 시작한 천주학 바람은 하늘 아래 같이 섬길 수 없는 초월적 대상으로 절대자의 참신한 개념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인습적 충성과 예종을, 다른 한쪽은 내세에 올 천국을 위해 현세의 고통과 핍박을 행복으로 감수하는 예외적 관행을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기왕의 모든 것들이 회의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박종성, 박탈과 제압의 역사중에서.

천주교도들은 귀신이 아닌 사람이었고 천주교인은 양반사대부들보다 더 인간적이고 애민적이란 것을 순조 초기의 공분의 탄압 속에서 조선 백성들은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조정도 이 광분의 탄압이 얼마나 무모하고 효과도 없는 자학(?)이었는지를 알고나서 천주교를 방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었다. 아직도 법은 사교엄단이었으나 단속의지가 사라진 법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호 천주쟁이들과 밥을 먹을 뻔했네..."

"아 아까 그 자들이 천주쟁이들이었나요?"

"손에 요물을 들고 있지 않던?"

"염주 말인가요?"

"호호 염주가 아니고 묵주라는 거다."

"묵주요?"

"호호, 그걸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면 천주가 와 무엇이던지 다 도와준다는구나."

오포장이 예조관원에게서 들은 천주교를 말하며 다른 주막으로 들어갔다. 서강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