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응!"

조종영이 오포장에게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다짐을 둔다. 오포장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노련한 관장의 부탁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어 아전(衙前)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호호 이건?"

"이거 말인가? 희설일쎄. 아주 재미나. 다 본 것이니 궁금하면 가져다 보게."

"그래도 되겠는지요?"

"그러게나."

오포장은 재빨리 책을 챙겨 자신의 무릎 앞에 놓았다.

"예전 같으면 숨어서 봐야 하는 책일쎄. 나같은 관장이 보다가 발각되면 체직감이었지."

조종영이 장죽으로 재떨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예전은 정조임금을 말한다. 정조는 '서상기'류의 잡서를 질색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조는 정학(正學)을 내세우며 속학(俗學)의 유행을 금기시 했다. 정조는 명말청초에 유행하여 조선에 들어온 소품(小品) 문체를 서학(사학)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학문의 기본인 왜(?)라는 질문에 넌더리를 냈다. 조선의 유수한 학자들이 경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고증(考證)하고자 하는 작업에 제동을 걸었다. 말단지엽에 매달려 성인의 큰것을 망친다는 이유였다.
정조는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 당대의 문사들을 비웃었다. 말단에 매달려 자칭 무엇(?)이나 된 듯 교만하고 헛소리만 내지른다는 악평을 퍼붓기도 한다. 당대의 빛나는 문인들인 이옥도 김려도 정조에게는 악의 종자일 뿐이었다.

정조는 학문이 성인의 경지이고 문인은 성인의 경지를 지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학문을 하는 요체와 문체도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패관소품류는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런 글들을 이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단의 문체를 쓰는 신하들을 골라내어 직접 반성문을 쓰게 하고 규장각 안에서 이런 책들을 골라내어 불태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모두 정조의 저서인 '홍제전서' '일득록' 등에 나오는 기록들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왕세정' '이반룡' 등 절세의 문인들이 펼쳐낸 문풍이 한중일 베트남을 포함한 동양 전반에 퍼져 있던 때였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정조는 조선의 군왕이란 이름으로 이 대세를 막아서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정조는 왕세정 이반룡 등의 글을 보고 모골이 송연하다 홍제전서에 적고 있다. 문장이 성인 도학의 담론을 버리고 인간의 부박한 삶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골이 송연하다 느낀 정조의 감상이 주목된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정조의 생각인 것이다.

"호호 그것참...."

오포장은 조종영의 방을 나오며 입맛을 다셨다. 조종영의 청을 별것이 아니었다. 향방의 몇몇 인사들을 압박해 달라는 것이었다. 관아의 형방으로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 관장 앞에서 조정을 공박할 정도의 인사들이라면 필시 한양에서 뒷배를 보아주는 유력가가 있을 터였다. 조종영은 오포장이 박종경의 수족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박종경은 안주 같은 시골에서는 하늘 같은 존재다. 서북의 유력자이며 상왕인 임상옥도 박종경과 손을 잡고 욱일승천한 인물이다. 임상옥은 박종경을 통해 조선 인삼 무역권을 독점한 전력이 있다. 임상옥은 청국상인들의 조선 인삼 불매동맹을 기지로 깨고 조정의 신망을 얻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