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은 청주로 강의를 내려가는 도중 강남고속터미널의 한 커피숍에서 메일을 보낸 사람을 만났다. 홍두인(洪頭人)이란 다소 이상한 이름의 사내는 키가 크고 풍체가 좋은 중년이었다. 고급 양복과 넥타이, 구두 그리고 머리 스타일 등이 세련된 사내였다.

"저를 보려는 이유가 뭐죠?"

김산은 홍두인이 내미는 명함을 받아들고 물었다. 명함에는 '홍제연구소' 실장이라 되어 있었다.

"저의 연구소를 혹시 아시는지요?"

홍두인이 반문했다.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요. 정조임금을 연구하는 곳인가요?"

"명함은 그렇지만 사실은 정조임금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이 주업입니다. 일종의 개인박물관이라 보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정조바둑판을 운운하셨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요?"

"하하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강의 시간 때문이라면 걱정 마십시요. 저도 오늘 청주에 일이 있어 내려가는 중이니 모셔다 드리지요."

홍두인은 김산의 개인 시간표까지 알고 있었다. 청주행 고속버스는 30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용건이 뭔지요?"

김산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그럼 말씀 드리죠. 자 이것 좀 봐 주시죠."

홍두인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봉투 속에서  크게 확대한 사진 한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은 바둑판의 배면(뒷면)을 찍은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둑판의 덮개의 안쪽면이었다.

"......?"

사진 속에는 초서로 내려쓴 백여 자 정도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김산은 그 글씨가 정조의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조연구 십년이 가져다 준 안목이었다.

"얼마전 저의 연구소에 구매  요청이 들어온 바둑판입니다. 이 기반명이 정조의 필체임은 여러 전문가가 고증을 했지만 내용 팍악이 전혀 안됩니다. 그래서..."

"초서전문가에게 보여 봤나요?"

"그럼요. 그런데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요?"

김산은 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 속의 문장을 살펴 보았다. 첫문장이 약군신방포급문(約君臣方包及文)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장이 알쏭달쏭했다.

"글자 파악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데...."

김산은 한문학자들은 몰라도 초서전문가들이 내용 파악을 못했다는 말이 모호한 문장에 있음을 알았다.

"알만합니까?"

홍두인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문장 파악이 문제군요?"

"맞습니다. 김선생님, 그래서 이 내용 파악을 부탁 드리려고요. 자 이건 약소하지만 자문료 입니다."

홍두인이 봉투 속에서 수표 두장을 꺼내 내밀었다. 백만원권이었다.

"완전 파악이 되면 이 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이게 제가 메일을 드린  용건입니다."

김산은 홍두인의 용건을 알고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김산에게 이런 일은 간혹 있는 일이었다. 시간강사로 생활을 할 수 없는 역사강의자에게 주어지는 아르바이트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