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친구와 바둑판 마주하고

깊은 밤이면 시 한수를 읊네.

무릉도원만 별천지라 하리오.

한가한 이곳도 그못지 않도다.

-김려.

(碁爲幽朋着. 詩因靜夜吟. 仙源非別界. 閑處可相尋.)

"선생?"

"선생은 무슨? 담정 어서 오시요. 이리...."

박제가는 남의 눈을 의식하고 김려를 주막 안의 한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 그리고 정갈한 반찬이 놓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우선 요기부터 하시요. 일행은 저쪽 방에서 접대하라 일렀소."

"선생?"

"자, 앉으시고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소? 어서..."

박제가는 김려를 밥상 앞에 앉히고 자신은 자작으로 술 한잔을 따라 마셨다. 박제가는 일년 전 '영평'현감으로 부임해 와 있었다. 오랜 규장각 검서관 생활과 중국사행을 몇 차례 다녀온 공로를 인정 받아 외직으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때가 박제가의 나이 48세 때였다.

"면목 없습니다."

"무슨 말을 그리 하시요? 중암이나 담정은 모두 나의 친구요. 이문회우(以文會友)하던 우리들 아닙니까? 자, 우선 요기부터...."

김려는 박제가의 말을 듣고 수저를 들어 국물을 입에 떠 넣었다. 밤을 새운 행군길의 노독이 스르르 녹는 듯했다. 방안은 따뜻했고 술향기까지 그윽했다.

"담정,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요. 하수상한 시절에 불상(不常)의 사상놀음에 끼어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이오?"

"성상의 지음입니다."

김려가 수저질을 멈추고 말했다. 고봉으로 퍼놓은 밥그릇이 벌써 반쯤 비어 있었다.

"그럴 겁니다. 앞뒤가 막힌 먹통들은 일을 그리 처리 못하지요."

박제가는 조정관료들을 먹통으로 표현했다. 박제가는 거침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기남자(奇男子)라 불렀다. 박제가는 당대의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박제가와 박지원을 양문(兩文)이라 불렀다. 그들의 평가는 중국문단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박제가와 박지원의 존재를 무시하고 싶었던 조선의 문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물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조선문단은 중국문단과 다른 목소리를 낼 엄두를 못하던 시대였다. 박지원 박제가는 중국 최고의 문인들의 평가를 받던 조선의 몇 안되는 문인이었다.

박제가가 서얼출신으로 찰방 현감 등 외직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문단이 인정한 실력 때문이었다.

정조가 오랜 검서관 생활을 하며 보수적인 관료들의 미움을 받는  박제가를 외직으로 보내려 1795년 춘당대 무과 시험에 응시케한 후 오위장을 거쳐 곧바로 영평현감으로 보낸 것도 박제가의 출중한 실력 때문이었다.

사실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란 자리는 별볼일 없는 한직이다.

규장각은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 6명의 문관이 있고 그 아래 잡직(雜職)으로 검서관 4명, 교서(校書) 서사(書寫) 화원(畵員) 10명이 배치되어 있고 그들 밑에 이속(吏屬) 백여 명이 배치되어 하나의 관청을 이루고 있었다.

검서관은 말이 검서관이지 일종의 별정직으로 하는 일은 그야말로 한가한 일이었다. 군왕이 강론을 할 때 참석자들에게 책과 필기구를 나눠주고 또 그것들을 거두는 등 허드렛일이었다. 그러나 검서관도 녹봉 대상인지라 가난하고 힘든 서얼문인들에게는 따뜻(?)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성해응 등 일류 문인들이 혜택을 입었다.

"담정, 요즘에도 시는 많이 지었소? 아니면 바둑 두는 것으로 소일을 했소?"

박제가가 김려에게 술 한잔을 따라 주며 물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시를 짓고 바둑두는 모임의 동인으로 그들은 지인지감을 주고 받던 사이였다. 그들 사이에는 열여섯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열 살 연상인 박지원이 박제가를 친구로 대접해 주었듯 박제가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김려를 친구로 대우하는 것도 글을 아는 사람은 모두 친구라는 이문회우(以文會友) 세계의 덕목에 충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