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를 조금 넘어 서울역에서 탄 1호선 전철이 오류 부천 부평을 지나 동인천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였다. 동인천은 인천의 구(舊) 도심으로 신축한 역사를 제외한곤 아직도 옛날 80년대의 모습을 간작하고 있었다. 정비되지 않은 작은 골목길과 우중충한 건물들, 무질서한 간판 등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했다.

"오 좋네."

김산은 동인천역 앞에서, 영종도로 엠티를 가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챙겨 우루루 내리던 대학동아리 시절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윤필수가 운영한다는 골동품가게 운심방(雲心房)은 역전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의 골목에 있었다. 그러나 지옥심의 단언(?)이 무색하게 문이 잠겨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 잠깐만..."

지옥심이 들고 있던 손전화로 윤필수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했다. 신호가 길게 가도 상대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 오는 날이 장날이네."

김산은 닫혀 있는 운심방의 내부를 창틈으로 살펴 본 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수년 전부터 끊고자 했으나 못끊은 웬수같은 담배였다. 운심방 옆은 구멍가게였고 그 옆으로 세탁소 부동산 중개소 작은 식당이 죽 늘어서 있었다.

"어쩌지?"

"전화를 하고 올 걸 그랬나봐. 전화 한번 더 해보고 바람이나 쐬고 가지 뭐."

김산은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듯 미안해 하는 지옥심을 달래며 역전 앞의 벤치에 앉았다.

"정조학술대회는 잘 돼가?"

지옥심이 생수 두 병을 사와 한 병을 김산에게 주며 말했다. 김산은 가을에 있을 '화성문화제' 주최측이 기획한 정조학술대회에서 논문 한 편을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준비는 하고 있는데 진척은 없네."

"호호, 그러니까 창찬을 하라니까? 창찬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지만 정조를 욕보이면 화가 따른다니까. 안그래?"

'하하, 나는 또 무슨 소리라고. 그런 건 신경 안쓰기로 했어. 학자는 자기 목소리가 중요하니까. "

김산은 정조연구가로 소장학자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너도나도 칭찬과 존숭 일색인 정조연구 성과들에 정색을 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에서 학계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 바둑판이 이번 연구에 필요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바둑계의 숙원사업이 하나 있는데 그 사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관심을 갖는 거야."

"바둑계의 숙원사업이라고? 그게 뭔데?"

"아 그런 게 있어."

김산은 지옥심의 질문을 어물쩍 넘기며 물을 한모금 마셨다. 지옥심이 무언가 다른 것이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참, 도인이는 잘 있지? 아직도 바둑학원 다녀?'

지옥심이 도인(道寅)이를 물었다. 도인은 김산의 아들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원이 아니고 도장이야. 바둑도장."

김산은 몇번을 설명해 주어도 학원과 도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옥심에게 말했다. 도인은 왕십리에 있는 천재바둑도장에 다니고 있었다 도인은 한국기원연구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