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이었다.

김옥균과 이규완이 장맛비를 뚫고 찾아간 일본공사관의 하룻밤은 '정변'이라는 대사건의 뇌관이 된다. 그들의 앞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고 바둑판 앞에는 이규완과 영사관 직원인 '참사'가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참사는 이또우에보다는 약했으나 출중한 기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본 공무원들의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다.

"끄응. 좋은 수요. 저런 때는 공세가 살길이지...암."

공사 다께조오가 김옥균의 얼굴을 바라보며 반상의 의견을 구했다.

"생로가 불확실 할 때는 사즉즉생이지요. 옛날 우리 개성땅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요."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성을 운운했다. 

"개성요? 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정변이 있었지요. 조선에는 비오는 날 바둑판을 준비하는 것은 정변을 도모한다는 도참이지요. 가조가(街祚)의 도참말입니다."

"오오? 조선에 그런 우화가 있소이까? 나는 몰랐소이다."

김옥균이 말한 가조가의 도참은 박포의 난을 말한다. 박포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간을 앞세워 이방원세력을 타도하고자 정변을 일으켜 개성시장인 '가조가'에서 전쟁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이 정변을 기안한 박포는 비오는 날을 골라 방간의 집을 찾아가 바둑을 두며 이방원세력을 선제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공사, 오늘 바둑은 어떤 의미입니까?"

김옥균이 두 사람의 바둑판을 응시하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께조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 그런 의미오이까?"

반상에서는 수세에 몰려있던 이규완의 돌이 무섭게 포위망을 뚫고 역으로 상대의 대마와 뒤엉켜 수상전으로 변한 상태였다. 가조가(시장)는 인간의 생도지망을 도모하는 최일선이다. 시장은 삶의 전쟁터이기에 고대국가에서는 병력을 움직이는 은어로 '가조가'가 쓰이곤 했다.

우중쟁기(雨中爭碁).

비오는 날의 한판 바둑이 피를 부르는 참혹한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박포사건을 김옥균이 들고나온 타이밍에 다께조에는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공사, 내가 가조가로 나가면 일본은 어찌할 겁니까?"

"으음...."

"공사?"

"잠시만요. 잠시만...."

다께조에는 창가로 가 국면(局面)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둑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