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폭풍전야였다. 임오군란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군왕과 조정의 허접을 조선 백성들은 모두 눈치를 채고 있었다. 무지렁이 하급 군졸들의 행패에 궁궐이 유린당하고 수천 명의 청군의 출동에 군왕의 아버지가 포로로 끌려가도 찍소리 못하는 것이 나라의 실체라는 것을 엿본 백성들이 조정을 예쁘게  보아줄 턱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면 조선은 거의 식물국가나 다름없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실증해준 사람이 박제경(朴齊絅)이다. 박제경은 '조선근세정감'의 저자다. 일설로는 박제형으로도 알려진 이사람은 상당한 식자층에 속하는 인물로 이 책자로 유명세와 곤혹을 한꺼번에 치르기도 한다. 박제경은 '배전'이란 사람의 책평을 받아 싣고있다. 이 내용이 대단하다.

임금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임금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비유하면 한 사회에 지혜와 의기가 있는 사람이 그 사회를 이끌어야 잘되듯 나라도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백성들이 임금(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는다는데 지극히 공평한 처사다. 임금이 자리를 사유화하고 천하를 가업(家業)으로 전하여 얼마나 큰 폐단이 생겨 나는가.

박제경은 김옥균을 따라 정변에 투신한 인물이고 배전은 김해관아의 아전으로 그야말로 이름없는 한촌필부다. 그러나 배전의 언급은 경천동지할 내용이다. 만약 이 언급을 김옥균이나 박영효 김윤식 등이 했다면 아마 이들의 학계의 대접은 지금보다 엄청나게 달랐을 것이다.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이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의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들도 이런 언급까지는 나가보지 못했다. 이들 3인은 개화를 화두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군왕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유교의 근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그랬다.

배전의 언급은 언급한 자체로 대역죄에 해당한다. 대명률이나 경국대전의 형법조항의 가장 죄목이 무거운 형이다. 이 언급이 포청이나 의금부에 발각되었다면 배전은 능지처참을 면치 못햇을 것이고 그의 가족들도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박제경도 세트로 처벌대상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 일로 다치지 않았다. 조선근세정감이 이미 세상에 출판이 되어 공유된 상황에서도 그랬다.

이 사실은 조선이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은 조타가 망가지고 항해사가 부재한 거대한 표류선이나 한가지였다. 조정은 복권된 민비와 그들 세력을 밀어주며 조선을 청국의 속방으로 계속 남겨두려는 청의 조종술만이 살아있었다. 서슬퍼런 민씨척족의 감시에 꼬리를 내린 대원군파와 그들 사이에 끼어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개화파의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으로 겨우 나라가 유지되는 형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