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도 헤아리지 못하면 안개와 같다. 구한말 서세동점의 문명의 거대한 물결이 조선을 향해 다가올 때에 눈멀고 귀먹은 청맹과니에 불과하던 조선 안에서도 안개 속에서나마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노력한 일부 식자층이 있었다. 그들은 더듬이로 어둠 속을 걸어가는 내일 없는 존재였지만 그나마도 하지 않으면 역사의 낙오자이자 방관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안개 같은 여명 속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창천한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있음을 느끼면서도 가야할 방법을 모르던 맹아였다. 박지원은 시대를 넘겨다본 식자층의 무능력을 이렇게 자탄한다.

도회지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눈을 뜬 맹아가 울고 있었다. 맹아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잃고 울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선 느낌과 직관으로 찾아다니던 자신의 집이었으나 갑자기 눈을 뜨고 보니 복잡한 골목과 많은 집들이 혼동을 준 것이다. 박지원은 울고 있는 맹아에게 말한다. 차라리 눈을 다시 감아라. 그러면 당신의 집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윤식(1835-1922)은 어유중과 더불어 개화파의 일원이다. 개화파에는 김옥균 홍영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윤식은 급진적 개화파인 김옥균일파와는 거리를 두고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고 처단(?)하는 입장에 선다. 김윤식은 1811년 청나라 천진을 방문한다. 청국의 변화상을 견학하고 조선에 들여올 방안을 모색키 위해 출발한 사신단은 천진 해광사(海光寺)에서 '오명화상'을 만난다.

오명화상은 청국의 개화승으로 조선말도 할 줄 아는 선각자였다. 김윤식은 오명화상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대청국 여정을 쉽게 가져간다. 사신단 일행은 해광사에서 바둑을 두며 교분을 나누고 청국의 사정과 여러 책자들을 소개받는다. 김윤식은 중국여행을 하면서 거치는 곳마다 청국관원들과 마추친다. 그들과 소통이 중요했는데 소통의 방법으로 바둑이 유용한 방법이 된다.

9월16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음산한 날 김윤식일행은 위양의 한 객점에 도착한다. 김윤식은 오랜 여정에 몸살이 나 몸이 불편하다. 그날 밤에 김순협, 황감역, 김판진 등 청국 관원들이 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게 바둑을 두게 된다. 김윤식 일행에게 바둑은 외교를 수월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가 된다.

김윤식은 중국여행 중 임오군란이 난 것을 알고 조선으로 귀국을 한다. 이때 인연을 맺은 청국 인사들의 도움으로 김윤식은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오경장 원세개 등과 선이 닿은 덕이었다. 김윤식은 이때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다 후에 민비와 갈등하며 충청도 면천으로 유배를 와 '음청사'를 남겼고 유명한 시무설(時務說)을 쓰게 된다.

임금 한 사람의 사사로움을 깨트리고 공상을 넓혀 각기 사람으로 하여금 제힘으로 먹고 살며 그 능력을 다하게 하고 권리를 보존케 하여 국가를 부강케 하는 것이 시무의 하나다. 법을 세워 기강을 베풀고 사람을 뽑아 관직을 맡기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기물을 다스려 외세의 침탈을 막는 것이 또 다른 시무다. 
 

김윤식은 국권이 찬탈된 후 일제의 작위를 받는 등 굴곡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귀족으로 살다가 어느때는 총독부에 조선독립을 청원했다가 작위를 삭탈 당하기도 하는 등 갈피를 못잡는다. 그가 대종교 활동에 나섰던 것도 국권을 지키지 못한 자학으로 보인다.
김윤식은 말했다. 조선은 바둑돌을 쌓아놓은 것만큼이나 위태롭다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보듬기 위해서는 포치(포석)가 중요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