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극하옵니다. 마마..."

민응식은 민비의 자학적인 질문에  듣기 민방하다는 듯 상체를 조아렸다.

"호호 망극할 거 없네요. 이것이 현실이고 현실은 언제나 엄혹하죠. 민진사도 요순시대를 꿈꾸는 못난 사람은 아니겠지요?"

민비는 사서(四書)를 기본으로 한 적토 유가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지만 조선이 유가의 병통으로 골속골속이 썩어 있다는 것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마마 하문을 하시니 말씀드리지요. 소신은 조선이 이리된 이유가..."

"그래 뭔가요? 조선이 망조가 든 이유가?"

"마마...?"

민응식은 민비의 얼굴을 살며시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개의치 말고 말해보세요? 조선이 망조가 든 이유를 말예요? 그래야 망조를 치유할 수 있을 거 아닌가요?"

민비는 의연했다. 민비는 격식이 없는 여자였다. 고등한(?) 문벌에서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여느 왕비들과는 다른 사람이 그녀였다.

"물으시니 한 말씀 올립니다. 조선은 문과 덕의 나라라 하면서 그것을 주창하는 양반사대들부터 그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일삼는 탓이 아닌가 하옵니다."

"호호 양반 사대부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인가요?"

민비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 하는 것이 오늘날 조선의 고관들이요 양반 사대부들 아니옵니까?"

민응식이 '책은 책이고 나는 나'라는 식의 조선의 지도층의 사고방식을 비꼬았다. 조선은 유교 국가다. 위정자들은 공맹의 도를 반석으로 삼아 나라를 이끌어오면서 공맹의 도는 위정자들의 것이 아닌 평민 상민 천민만의 것으로 국한해온 지 오래였다.

양반사대부들은 공맹의 도를 평민 상민 천민들에게 던져놓고 자신들은 그 위에 군림하는 방관자요 치외법권자들이었다.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온갖 모리배짓을 일삼으며 하층민들에게는 근검절약과 미풍양속을 강조하고 그것을 법으로 운용하며 백성들을 옥죄고, 정작 자신들은 온갖 부정축재와 축첩질을 일삼는 비상식적인 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공할만한 모순행위였다.

"호호 그 말은 왕실도 소용되겠지요?"

민비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듯 반문을 했다. 민비 자신도 호랑방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자신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기 위해 영의정 이유원을 청나라에 보내어 수만금을 탕진했고 세손을 낳기전에는 전국의 명산에 암자를 짓고 치성을 들이며 수만금을 탕진한 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