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도 지소태후는 신국(神國)이란 말을 곧잘 썼기에 진흥왕은 그런 말을 수시로 들었었다. 신라를 특별히 생각한 말이라 여겼는데 미실의 눈길이 비웃음을 담고 있어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신국이 어떤 나란지 아는가?”

“신라와 같은 나라겠지요. 여인이 남정네를 섬기는 게 세상 이치지만, 신국은 달(月)의 정령을 받아 여인의 힘이 강성해진 나라지요. 마마, 신국엔 여인이 살아가는 법만 있을 뿐 제왕의 법은 없나이다.”

“제왕이 필요 없다는 게요?”

“허수아비라 해도 제왕은 필요 있겠지요. 장차 신라의 역사가 여인에 의해 조작된다 해도 시비 걸 사람이 없겠지요. 만약 누군가가 시비를 일으켜 바른 섭리를 주장한다면 그에게 안긴 건 태후마마가 키우는 꽃이겠지요. 그리되면 상하의 위계질서가 혼돈을 가져오고, 힘 있는 자가 일어섰다 꺾여지고, 말 잘하는 자가 한때나마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활개를 치겠지요.”

“어허, 어찌 그런 일이···.”

“부정하겠지요. 아니라고 고개를 젓겠지요. 결코 있을 수 없는일이라 하겠지요. 풍월(風月)이란 게 어떤 것입니까? 바람과 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태후마마가 만드시고 그 주인되는 풍월주를 당신 마음대로 세웠으니 마마께 왕권을 빼앗겼다고 아쉬워하겠습니까? 지금은 아니라 하나 때가 되면 마마의 어탑(御榻)도 유명무실해질 것입니다.”

진흥왕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가 여덟 살 때 보위에 올라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어머니는 슬기롭게 대처했다. 병권을 쥔 장수에겐 예외없이 치마끈을 풀었으나 그게 잘못이라고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약한 여인이기에 그 정서가 바람과 달이라 여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고 미실이 지적한 것이다.

“바람과 달은 잡을 수는 없지만 형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느낄 수도 있으나 그걸 잡을 수는 없습니다. 달의 정령을 받은 여인의 나라에서는 가장 두려운 게 뭐겠습니까. 태양입니다. 그것만이 달의 기운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대왕, 쇤네가 대왕의 사람이 됐으니 이젠 대왕을 위해 일해야지요. 구름이 앞뒤로 끼어 모든 걸 차단해도 그것을 벗겨내 대왕의 정령이 신라땅 곳곳에 울릴 수 있도록 도와야지요.”

“그게···, 그게 그대를 원화(源花)로 삼으려는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대왕. 쇤네가 원화가 되면 태후마마를 비롯해 세종 전군의 힘을 막을 수 있나이다.”

“알겠소. 월성에 돌아가면 그리 영을 내릴 것이오.”

미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왕 가까이 다가앉았다. 이젠 한 단계 어려운 고비를 넘은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때 월성에서 달려온 파발마가 상서롭지 못한 소식을 알렸다.

“대왕마마, 왕후마마의 급한 전갈이옵니다.”

“무엇인고?”

“태자마마가 부자(附子)에 중독돼 사경을 헤맨다 하옵니다.”

“부자라니, 왕궁에 부자가 있었단 말인가?”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왕후마마께서 이같은 급보를 소인에게 주어 말을 달렸나이다.”

다음 보위를 이을 동륜태자가 부자(附子)에 중독돼 사경을 헤맨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대왕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월성으로 돌아와 태자가 누워있는 보명궁을 찾아갔다. 당연히 태자궁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도왕비가 안내한 곳은 보명궁이었다.

“태자가 어찌 이곳에 있소?”

왕후는 핑계를 댔다. 월성에서 달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곳은 보명궁이니 부자의 독성을 다스릴 장소로 적격이란 말을 내놓았다. 대왕이 누워있는 태자를 잠깐 들여다보고 나서 남당으로 향하자 왕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실은 잠시 이곳에 있게 하소서.”

“미실을?”

“그의 할미 옥진궁주에게 부자 사용에 관한 비방을 배웠다 들었나이다. 그게 태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책이길 원하나이다.”

“그리하도록 하시오.”

대왕이 남당으로 돌아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금방 죽을 것 같은 태자가 벌떡 일어나 사도왕후와 미실을 놀라게 하는 것 아닌가. 태자는 여유가 있었다.

“어마마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미실 낭주를 소자에게 내려 왕손을 생산하게 하지 않았나이까. 하온대 소자에게서 미실 낭주를 빼앗으면 소자가 반역이라도 하길 원하십니까?”

   “말을 삼가세요, 태자!”

“어마마마, 그렇지 않습니까. 미실 낭주가 소자의 아들을 낳으면 태자비(太子妃)를 시킨다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소자는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아바마마에게 보낸 건 무슨 이윱니까?”

“왕실은 앞을 예단할수 없는 위험이 많습니다. 그 위험이 나와 태자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에 대왕께 미실을 보낸 겁니다. 그 위험은 태자의 행동 여하에 따라 나타나게 됐으나 이젠 미실 낭주를 마음에서 지우세요.”

  “그럴순 없습니다. 나도 감정이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아바마마에게 빼앗기고 반역을 생각지 않겠습니까?”

“말을 삼가라지 않습니까, 태자.”

   “어마마마 뜻대로 하신다면 소자는 죽는 한이 있어도 반역을 꿈꾸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마마마!”

▲신국을 바람과 달로 표현하였다.

▲원화(源花) ; 화랑의 실제적인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 ; 화랑의 명목상 우두머리

▲어탑(御榻) ; 왕의 의자. 용상

▲뱀 무늬 단검은 첩자들이 사용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