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녀가 말했다.
“덫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자 보세요. 제 반지를요.”
그녀는 사파이어 반지의 하단부를 옆으로 밀쳤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약간 세운 상태에서 술잔에 톡톡 떨어뜨렸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게 정제된 가루약이었다.
“이 약은 누에를 말려 정제한 흥분제죠. 아무리 자제력이 강한 사내도 술에 타 마시면 얄쨜없어요. 조금 전 ‘촤이샤’를 가져올 때 그 사람은 흥분제를 탄줄 알아요. 그러니까 자릴 비켜줬죠.”
그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이 거실은 브이티알(VTR)방이예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스위치만 누르면 건넌방에 있는 브이티알 기기에 녹화 되거든요. 박기자님,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저와 박기자님이 관계를 가지면 자동으로 녹화된다구요. 녹화 테잎만 있으면 박기자님과 흥정할 수 있잖아요? 아니 박기자님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구요.”
“허어?”
일우는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난 격이었다.
“부인께선 왜 그런 얘길 해주시죠?”
이경실은 잠깐 침묵했다가 뒷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날 속였어요. 결혼한 이후 사업 때문이라는 핑계로 여직원과 놀아나고 여직원의 약혼자 박도식이라는 청년이 나를 찾아와 모든 걸 털어놨어요. 처음엔 저 사람을 용서할까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박도식이가 저이에게 재정보증을 서게 하고, 얼마 전 사고를 치고 잠적해 버릴 때까지 모른 척했죠.”
“그렇다면, 하남 공장의 방화도 그 친구 소행입니까?”
“아마, 그럴 거예요.”
“부인께선 왜 만류하지 않았습니까?”
“결혼 초에 여직원과 바람피우는 남편을 보고 있으란 말예요? 난 그럴 수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헤어져야죠. 우린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어요. 이혼할 거예요. 모든 건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요. 여직원이나 박도식 씨의 증언도 받아낼 수 있어요. 여의치 않으면 구로다 사에 부탁해 회사 정리를 서두를 수도 있구요. 물론 최악의 경우일 때죠.
위자료를 청구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요. 더 이상 저 사람과 지낸다는 건 생활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지옥이죠.”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일우는 그답지 않게 엉성하게 물었다.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저 사람 계획대로 움직여 주세요.”
“뭐라구요?”
“모레까지 5천만 원 보내겠어요. 그 대신 지금부터 브이티알(VTR)에 녹화해 주세요. 그 사람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럴 수 있죠?”
“도대체….”
“어차피 그이가 저지른 일이에요. 그이가 녹화 테이프로 상대를 괴롭힌다면, 저 역시 그 테이프로 남편을 궁지에 몰겠어요.”
“….”
“잡지사에…, 사진과 자료…, 제가 보냈거든요?”
“예에?”
“익명의 중학생을 만들고 이 일에 협조한 사람도 있어요. 이윤 묻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남편을 혐오하는지 그것만 인정해 주세요. 자, 드세요!”
그녀는 약가루가 든 컵에 술을 따라 일우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망설이다 단숨에 들이키자 그녀는 환한 낯으로 속삭였다.
“어차피 벌어진 게임이니 화끈하게 해요. 그래야 저이도 좋아하겠죠. 그쵸? 자, 이리 오세요.”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창틀을 후려치는 빗줄기가 거칠어지자 금방이라도 아파트를 허물어 버릴 듯 사납게 덜컹거렸다. 건너편 아파트 옥상이 폭우에 난타 당해 금방 허물어질 듯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빗발은 막무가내로 후려쳤다.
여전히 도청기의 수신기는 거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해 주었다. 어슴푸레 예상하고 있었지만 모든 게 사실로 들어나자 오히려 담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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