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태후는 따끔한 훈계를 내렸으나 마음 한자락엔 껄끄럽게 걸리는 게 있었다. 코흘리개 때부터 세종이 어떤 성품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잘 알았다. 그런데 다시 하루가 지나자 요상한 말들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기리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다 굶어죽은 그들의 용기를 찬양했다. 전군 처소의 시비가 허겁지겁 달려와 울음을 터뜨렸다.

“태후마마, 전군을 살려주옵소서. 벌써 사흘이 지나가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습니다. 이러다간···.”

“어허, 물러가거라.”

“태후마마!”

“물러가라는 데도 떠드느냐! 내게 생각이 있으니 물러가거라. 내가 전군 처소에 들를 것이다.”

시비는 눈물을 닦고 돌아섰지만 태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불 구경하듯 가만 있었는가. 아니다. 은밀히 사람을 풀어 미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그녀가 영흥사에 사다함과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미실을 데리러 간 태후전(太后殿) 시종만 홀로 돌아왔다.

“어찌 혼자 돌아왔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미실 낭주께선 월성에 돌아올 마음이 없다 합니다. 전임 귀당비장을 지낸 사다함 공을 서방님으로 받들며 편히 살고 싶답니다.”

“내 명이라 했는데도 그러더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미실 낭주가 그랬습니다. 한때 더러운 세상의 그물에 갇히고 보니 헛된 생각이 들끓었으나 부처님의 발 아래 있으니 모든 게 깨알처럼 보인다 했습니다. 이젠 세상의 더러움에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니 소인더러 돌아가라는 당부였습니다.”

마음속으론 ‘고약한 것’이라 짓씹었지만 태후 입장에선 강하게 몰아붙일 건덕지가 없었다. 더구나 미실과의 일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소한 불화가 아니라, 왕실의 피 흐름을 뒤바꿀 중대한 일이었다. 미실이 앞뒤 안 가리고 날뛰기에 요망한 것의 행위를 차단시킨 것인데 불쑥 세종 전군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지소태후는 일단 세종 전군의 거처를 찾아가 어떤 상황인지를 살폈다. 방안에 음식을 들인 흔적이 없고 아예 물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찌보면 죽기를 각오한 것 같았다.

“이것보세요 전군, 이 무슨 짓입니까. 같이 사는 계집이 집을 나갔다고 음식을 끊어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이제라도 툴툴 털고 일어나 음식을 드세요. 인왕동의 사냥꾼이 꿩을 두어 마리 잡았다고 그걸 가져왔어요.”

그러나 말이 없다. 미공자(美公子)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횟칠을 한 상태니 어찌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덜컥 두려움이 태후에게 몰아쳐왔다.

“전군, 에미가 밉습니까. 미실 그 아인 요망합니다. 눈을 보세요. 합안(鴿眼)이에요. 비둘기 말입니다. 바로 그 비둘기 눈이에요. 그 눈은 기회만 있으면 남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수많은 수컷을 불러들여 색사를 벌입니다. 오죽했으면 구간(鳩姦)이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구구거리는 비둘기가 정겹다고 하지요. 남 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의 눈을 피해 색사를 벌이는 게 한두 번일 줄 아십니까. 전군이 그 아이에게 빠진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분란의 씨를 다시 왕실에 불러들일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세종은 태후의 말이 듣기 싫었는지 몸을 뒤척여 돌아누웠다. 그것을 달갑지 않게 내려다보던 지소태후는 횅하니 나와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세상살이의 수치(數値)에 밝은 태후지만 아드님 문제만큼은 생각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니 감당하는 게 여간 만만치 않았다.

“티벳의 고승들이 미실을 보고 둘도 없는 요물(妖物)이라 했겠다. 스님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미실의 용모가 그렇다는 것일 게다. 오죽했으면 계집 하나가 수천 명의 병사를 다스린다 했겠는가.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다. 세종 전군이 계집의 치마폭에 푹 빠져 다른 사람 얘긴 듣질 않으니 어찌한다.”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한 태후고 보면 이번 일도 수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대원신통을 타고 난 계집을 가까이 둘 수 없다는 마음에 비상한 조처를 내렸지만 이렇게 삐그덕댈 줄은 예상  밖이었다.

‘세종 전군이 거짓으로라도 칭병을 핑계해도 내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 계집 때문에 왕손을 죽일 순 없으니까. 휴우, 나이가 드니 모든 게 번거롭고 버겁기만해. 명을 내려도 그걸 즐거운 마음으로 받는 이가 없으니 이런 일이 생긴 게야.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머리를 숙여야지 어찌 하겠는가.’

지소태후는 자신의 말(馬)을 다루는 시종(侍從)에게 서찰을 주어 영흥사에 머무는 미실에게 보냈다.

<···내가 왕실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일을 간섭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너에게 상처를 안긴 것 같다. 이제 지나간 건 모두 잊어버라고 네가 왕실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종전처럼 거처에 머물 수 있으나 세종은 진종 전군의 딸 융명을 정실부인으로 받아들였으니 네가 차비(次妃)로 전군처소를 이끌도록 하라.>

이것은 세종 전군의 정실주인으로서 미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둘째부인으로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종이 받아온 회답엔 엉뚱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합안(鴿眼) ; 눈동자가 새까만 비둘기 눈. 관상학적으론 대단히 음탕하다고 평가함  
    ▲구간(鳩姦) ; 마음이 움직이면 어느 누구하고도 간음을 함 
    ▲융명(戎明) ; 진종전군의 딸

  ▲옥으로 만든 매는 사랑하는 남녀들이 정표로 준다는 말이 있으나 이 역시 귀족들의 노리개다.